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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 인문학살롱 ‘삼지재’ 보수로 ‘호남 인문학 산실’로 거듭날 준비
  • 기사등록 2020-05-16 15:59:54
  • 기사수정 2020-05-16 2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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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 인문학살롱이었던 삼지재가 복원 돼 호남 인문학 산실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삼지재(三芝齋)는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에 있는 옛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 인문학살롱이었다명사들이 이곳을 방문해 시대를 논했던 곳이었고또 많은 인재를 배출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16세기 무렵으로 전해지고 있다양응태(梁應台, 1514~1571)가 백초가등에 자리를 잡아 거주(1565년경)하기 전부터 있었던 건물로 보고 있다.

 


양응태의 부친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고동생은 의병의 선각자 송천 양응정(梁應鼎)이다그의 증조부는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된 양담(梁湛)이고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된 양이하(梁以河)이다그는 1540(중종 35) 식년시에 생원 2등 13위로 입격하였고, 1543(중종 38) 식년시에 병과 10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52(명종 7)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고, 1553(명종 8)에 해미현감(海美縣監)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양응태는 1565(명종 20) 9월에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고, 1569(선조 2)에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역임하였다이후 예조참의(禮曹參議), 정주목사(定州牧使등을 역임하였다.


숨어 있던 삼지재는 양응태가 건물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양응태가 동래부사에 부임하기 직전 1565이곳 백초가등에 자리를 잡아 거주하다가 이집을 발견했다는 것이다당시 칠넝쿨과 함께 사라질 뻔했지만 이를 찾아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학포 양팽손과 양응태의 후손들이 건물을 건립하고 경영을 하였고근대기인 1921년까지도 삼지재 서계(三芝齋書契)를 운영해 월곡의숙을 개설했다수백 년 동안 인재배출 요람서재그리고 다시 책을 발간하던 의미 있는 역사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 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 골짜기를 예부터 서당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삼지재가 서당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지재 정내에 시문을 적은 현판이 무려 20여개의 편액이 빼곡이 현액되어 있다. 


은거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던 정재훈(1835~1912)이 이곳에서 삼자재철접운(三芝齋撤接韻)을 남겼다

 

이는 삼지재가 암자가 아닌 문학의 산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헌액된 글 중에는 

산재의 한가한 날에 삼지를 읊었으니

사숙한 제군들은 또한 더디지 말게

옛적에 동근형제의 약속을 추억하여

오늘에 이르러 일체자손이 가졌도다

 

이는 세상을 이야기하던 곳강학하고 공부했던 곳이었음을 이야기해준다


이곳은 또 출판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1892년 능주 삼지재에서 목판으로 중간에 삼지재본의 일부분을 보각추각한 것이 후쇄본인 <정암선생문집>이다또 1929년 화순 삼지재에서 간행된 사실을 담은 판권지 등 이곳에서 많은 서적도 연구 출판했다


공부하고 책을 만들던 곳, 이 곳이 현재도 선대의 뜻을 이어 호남 인문학 산실로 운영하자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학포학과 양응태의 대외 외교학송천 양응정과 그의 아들 양산숙으로부터 시작된 호남 의병사그리고 덕촌 양득중과 화순으로 연결된 호남 실학, 민족지도자 지강 양한묵의 독립운동사삼지재서계와 월곡의숙으로 시작된 호남 교육사를 연구하는 인문학 살롱으로 운영하자는 것이다. 이는 호남학의 전반적인 큰 흐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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