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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생명-국가의새 틀을 짤 때다


한국 재정 규모는 과거보다 훨씬 커졌고, 방역 성공으로 한국의 일부 산업은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커졌다. 더구나 유럽 등 복지국가들도 방역에서 큰 허점을 드러낸 상태이고 시장주의,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자체가 도전을 받기 때문에 한국은 특정 국가를 모델로 삼기보다는 스스로 모델을 구축해야 할 위치에 놓였다.


           

 김동춘 ㅣ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개인이나 국가에게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쟁이나 재난 등을 계기로 운명처럼 오기도 한다. 지금 한국은 사회경제 질서를 재구조화할 큰 기회를 맞이했다. 


문재인 정부의 효과적 대처, 수많은 의료인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의 결과이나, 코로나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한국의 국가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게다가 4·15 총선으로 집권 여당이 180석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의 기본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고, 취약한 사회안전망과 사회정책의 틀을 새롭게 구축할 절호의 기회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직후,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등장과 외환위기 직후 성장주의·가족복지 사회체제의 변화를 시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맞아 공공복지의 확대에서 난관에 부딪혔고, 1997년 외환위기는 재벌의존·노동배제의 정치경제 질서의 틀을 재구축할 수 있는 계기였으나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국제 금융자본의 거대한 압력에 맞서서 주권국가의 정책을 구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국가부도의 대위기 속에서 김대중 정부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만들고, 4대 보험 체제를 나름대로 완성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민주화 이후 최초의 민주정부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회정책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런 정책도 터진 둑 앞에 가래를 들이대는 정도로 방어적인 것이었고, 사회 붕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것이었다.


코로나 대재난으로 여러 서비스 산업이 붕괴 위기에 몰리고, 대량실업 사태가 이제 본격화하는 지금은 외환위기 당시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재난은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출 길이 막혔고, 한국만의 힘으로 이 경제 재난 상황을 돌파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 재정 규모는 과거보다 훨씬 커졌고, 방역 성공으로 한국의 일부 산업은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커졌다. 더구나 유럽 등 복지국가들도 방역에서 큰 허점을 드러낸 상태이고 시장주의,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자체가 도전을 받기 때문에 한국은 특정 국가를 모델로 삼기보다는 스스로 모델을 구축해야 할 위치에 놓였다.


대재난은 언제나 사회의 자기반성의 기회이며, 새 시스템을 구축할 좋은 기회다. 영국은 2차대전의 포연이 자욱하던 시점에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겠다는 복지국가의 비전(베버리지 보고서)을 세웠고, 미국의 루스벨트 역시 대공황과 2차대전의 참화로 경제가 총체적으로 붕괴한 시점에 복지체제의 틀을 만들었다. 


지금의 코로나 대재난은 사실상의 전쟁이다. 며칠 전 미국 내 하루 사망자 수는 이라크 전쟁의 미국 군인 사망자에 맞먹을 정도였고, 무연고 시신들이 쓰레기로 취급되어 섬에 묻히고 있다. 지금 미국과 유럽이 반시장, 반자유주의적 국가개입 정책을 거침없이 내도 반론조차 펴는 시장주의자들이 없다.


지금의 코로나로 인한 인위적 재난은 인간의 무차별적인 자연파괴에 기인한 것이지만, 가까이는 미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의료의 영리화와 공공성 실종이 초래한 것이다. 물론 이탈리아·프랑스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지출, 특히 공공의료지출 자체가 위험에 대한 안전판이 아니고, 의료의 공적 소유가 공공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공공지출에서 이들에 비해 훨씬 뒤처져 있는 한국이 정부와 민간의 적절한 협조, 투명성, 신뢰, 시민참여 등의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여 지금까지 방역에 성공한 것은 기존의 선진 복지국가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부는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해고방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심각한 노동양극화와 불안전 노동자층, 지난번 콜센터 사례에서 보았듯이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대량의 노동자층, 과도한 특수고용직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 등 우리 내부의 구조적 치부는 곧 폭탄이 되어 터질 것이다. 


그렇다고 땜질 처방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러한 ‘문제’를 바탕으로 큰 집을 짓기 위한 ‘구상’을 해야 한다. 조직 노동과 진보정당의 힘이 미미한 한국이 하루아침에 선진 복지국가가 되기는 어렵지만, 지금 국내외의 좋은 환경은 큰 정치 자본이다. 


정부는 도시 중산층을 염두에 두고 교육투자·아파트투자·가족복지의 길을 유도해온 개발주의 시대의 정책 노선을 버리고, 자발적 연대, 시민참여의 민주적 공공성의 자치를 확산시켜야 하며, 노동친화적 공공복지를 구축해야 한다. ‘안전-생명 국가’가 21세기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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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30 17: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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