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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미국의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이 1962년 출간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사용한 신조어 '패러다임(Paradigm)'은 오늘날 보통명사가 됐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과 전환을 예시로 기존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새로운 관점이 미래의 지배적 개념으로 확장하는 과정을 패러다임 전환으로 규정했다. 현재는 과학을 넘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全)영역에서 사용된다.

'석유고갈론'과 '중국부상론'은 21세기 초반 경제부문의 대표적인 패러다임이었다. 석유고갈론은 신재생에너지, 자원외교, 지구온난화 등과 맞물려 세계적인 담론과 정책으로 확산됐지만 최근 마이너스 원유가격까지 형성되면서 근거를 상실했다.


 또한 중국이 2020년대에 미국과 대등해지고 2040년대에는 세계 최강이 된다는 중국부상론도 경제성장 둔화에 뒤이은 우한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관련 정보의 은폐 의혹으로 빛이 바래고 있다.

석유고갈론의 역사는 석유의 활용과 함께 시작됐다. 1914년 미국의 광산국은 10년 내 미국 석유매장량 고갈을 예측했고 1939년 미국 내무부는 앞으로 13년간 사용할 석유만 남았다고 우려했다. 1972년 서유럽 지식인들로 구성된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에서 2000년대 초반 석유고갈을 예언했다. 이후에도 국제원유가격이 상승할 때마다 석유고갈론은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연간 300억배럴을 소비하면서도 매장량은 1980년 6433억배럴에서 2016년 1조7067배럴로 늘어났다. 이는 기술의 발달로 탐사와 채굴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셰일오일 등 신규공급원이 확보됐기 때문이다. 2012년 배럴당 200달러 돌파를 외치던 소위 전문가들이 무색하게 하락하던 원유가격은 급기야 4월 중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일시적 수요 감소 요인이 겹쳤지만 앞으로 종말론적 석유고갈론은 일부 극단적 환경보호론자를 제외하고는 공감대를 얻기 어려울 전망이다.

중국부상론은 지리적 인접성과 문화적 유사성까지 결부돼 우리나라에서 특히 위세를 떨쳤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경제성장이 가속화 되면서 중국 열풍이 몰아닥쳤고 소위 중국전문가들은 앞 다퉈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2020년대에는 미국 수준으로 도약하고 2040년대에는 국가적 위상에서 1위가 될 중국에서 미래를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2020년 현재 중국은 경제파탄은 물론 체제붕괴의 위험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성장둔화, 재정팽창, 금융부실의 경고음이 나오는 가운데 지난해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의 충격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 등 주요국에서 중국 정부가 전염병 초기에 관련 사항을 은폐해 전 세계 유행을 초래했다는 책임론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미주리와 미시시피는 주정부 차원에서 중국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유사한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전염병에 대한 직접적 피해와는 별도로 중국이 축적한 신뢰 기반 소프트파워의 급속한 약화는 명약관화하다. 국가위상의 추락과 글로벌 분업체제에서 입지의 후퇴가 불가피하다고 예상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지난 10여년 동안 전제로 삼았던 석유와 중국에 대한 기존 패러다임의 붕괴는 작금의 상황이 국지적 환경변화 차원이 아니라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질서 전개라는 시사점을 준다.


석유는 과거의 전략물자에서 상품시장의 일상재화(commodity)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는 천연자원에 기반하는 아날로그 경제가 기술기반의 디지털 질서로 이행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상징한다. 중국부상론의 허구성은 시장경제에 기반한 혁신적 생태계가 아니라 명령과 통제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체제의 본질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기존 사고방식을 탈피하고 코로나 이후에 전개될 세계경제질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통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시아경제 20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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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8 1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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