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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장)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인류가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 각국의 실력이 드러나고 있다. 세계가 우리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칭찬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민주 시민의 연대와 협력에 기초한 높은 시민의식이다.

우리의 높은 시민의식은 ‘사재기 제로’에서 더 빛난다. 우리나라에 쌀을 수출하는 부자 나라 미국에서 쌀을 살 수 없는 ‘코스트코 패닉’이 나타났다. 유럽, 일본, 영국, 심지어 곡물 수출국인 오스트레일리아 등 선진국에서도 사재기가 극성이다. 우리나라의 ‘사재기 제로’에 대해 사스나 메르스 사태의 학습효과라는 분석부터 최근 급성장한 택배 시스템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나는 위기 때마다 발현되는 우리 국민에게 내재된 특유의 대동(大同) 디엔에이(DNA)가 있다고 생각한다. 멀리 임진왜란의 의병, 광주민중항쟁의 주먹밥, 외환위기의 금 모으기, 최근의 마스크 나누기 등은 이러한 대동 디엔에이가 발동한 것이다.

우리 국민의 높은 시민의식에 자긍심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만약 코로나19 팬데믹이 가까운 장래에 종식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사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먹거리가 불안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식량위기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농작물의 전 세계 공급량은 충분하다고 하지만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 우선 러시아를 비롯한 주요 농산물 수출국이 수출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국경·지역봉쇄로 농작물의 선적, 트럭 운송이 제약을 받고 있다. 수송 제한은 농작물뿐 아니라 비료, 동물 의약품 등 농업투입재의 공급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사회적 이동의 제한으로 농업노동력을 구할 수 없어 농업 생산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식량위기가 발생한다면 우리나라는 가장 취약할 나라 가운데 하나다. 식량자급률이 극도로 낮기 때문이다. 2018년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1.7%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의 13%는 영양 섭취가 부족하다. 국민이 일상에 필요한 칼로리를 38.8%밖에 자급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발생해도 과연 대동 디엔에이로 극복할 수 있을까. 식량위기는 부자들에게는 식품가격 상승의 문제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코로나19로 학교급식이 중단되자 누구에게는 아이들 식사를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지만 누구는 아이를 굶기는 것을 걱정한다. 식량위기는 이러한 계급성 때문에 그 심각성에 비해 사회적 주목을 덜 받는다.

우리는 당장 닥칠지 모를 식량위기에 대해 대비책을 세워야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의 먹거리 정책도 새로 정립해야 한다. 코로나19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초연결된 지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 국민의 생명줄인 먹거리를 초국적 농식품업체가 지배하는 세계 식품 시스템에 맡길 수 없다. 건강한 먹거리는 국민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책무가 있다.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고, 식량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농어민 사이에 사회협약이 필요하다.


 농어민과 농어촌 주민은 안전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농어업·농어촌의 다원적 기능과 공익적 가치를 극대화하여 국민 행복에 기여하고, 국가와 시민사회는 농어민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농수산물의 가격을 안정시키고 농어업·농어촌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대가를 지급할 책임을 진다. 이러한 사회협약을 토대로 우리의 농어업 정책과 먹거리 정책의 틀이 바뀌어야 한다. (한겨레신문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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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3 14: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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