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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 교수)


강도 높은 주민격리령이 시행 중인 미국에서 재난을 통과하다 보니 이 시절 선진국은 대한민국임을 실감한다. 남의 나라를 강타한 바이러스에 태무심이던 미국은 방심하는 사이 지역감염이 만연하여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서 세계 1위가 되었다. 뒤늦게 마스크 쓰기를 권고하고 있지만 '물리적 거리두기'에 저항하는 시위대까지 등장한 상황이고 보면 당분간 사태는 쉬 좋아질 것 같지 않다. 경제적 권리와 개인의 자유를 외치다 너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요즘 미국 방송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말이 '사우스코리아는...'이다. 전 세계를 마비시킨 대재난 중에 일상이 유지되는 나라, 총선을 무사히 치러낸 나라, 사재기가 없는 나라, 정말이지 대단한 사우스코리아다. 그간 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전쟁 가능성이 있는 분단국에 불과했다. 늘 '북한에서 왔느냐 남한에서 왔느냐?'라는 질문을 받다가 '오, 사우스코리아!' 엄지 척,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깨가 으쓱해진다. 집주인 헬렌은 '미국이 이럴 줄 몰랐다'며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에게 미안해한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힘든 점은 바이러스 감염이 되어도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불안감이다. 스스로의 면역력에 기대어 몸이 이겨내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자가 호흡이 안 될 정도의 위급한 상황에서야 병원 문을 두드릴 수 있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알아서 살라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공공의료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나라의 비극이다.

이에 반해 설령 감염이 되어도 국가에서 잘 보살펴 줄 거란 믿음을 주는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든든한 나라다. 보살핌도 이리 살뜰할 수가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불과 6년 전, 세월호의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너무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은 우리가 울면서 묻던 말이다.


 국가가 국민을 이처럼 다부지게 챙겨주는 현장을 멀리서, 그것도 가장 혹독하게 재난을 겪는 미국에서 지켜보노라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자아도취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아픈 희생 끝에 정말 힘겹게 이루어낸 도약이라서 그렇다.

과거, '헬조선'이란 말이 낯설지 않던 대한민국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위기 때마다 놀라운 결집력과 의지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왔다. 그 가능성이 현실화된 선진 한국의 면모를 지금 체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 후진적인 면면들이 여전하다. 고통은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 되는 디지털 성범죄. 여성들은 몰카 때문에 공중화장실 이용이 두렵다. 임금이 체불되어도 받을 길 없는 이민 노동자들의 눈물. 산재사고로 한 해 천 명에 가까운 분들이 목숨을 잃는 위험한 노동현장. 높은 자살률.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는 무책임한 말과 글. 이런 현실 앞에서 더욱 다부지게 마음을 여밀 때다.

총선이 끝났다. 조건이 만들어지면 이후에 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더욱 큰 법이니 화급한 개혁과 입법을 잘 해나가길 바란다. 한국에 정착한 한 미국 청년이 최근에 한 말인데, 선진국에서 살고 싶어 한국을 택했는데 정말 코리안 드림을 살고 있음을 이번 재난 대응을 보고 실감했다 한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 약자들, 빈곤층을 보살피는 세심한 정책, 진실과 정의를 향한 잰 걸음으로 대한민국이 더 좋은 삶터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늘 그랬듯 불가능을 가능으로, 위기를 연대로 바꾸어 온 우리들의 단단한 저력에 기대어 본다. (아시아경제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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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0 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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