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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립대 교수)


코로나19와 그 경제적 파장에 겁을 먹지 않는다면 분명 무신경한 사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질병 확산이 둔화되더라도 앞으로 몇 달 동안 줄잡아 수만 명의 미국인들이 숨질 것이다. (실제 사망자 수는 정부의 공식집계보다 더 많을 게 분명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달성하기 위해 단행된 경제 폐쇄로 지난 3주간 거의 1,700만 건의 신규 실업수당청구로 이어졌지만, 실제로 사라진 일자리 역시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주 들려온 가장 무서운 소식은 돌림병이나 경제상황이 아니다: 위스콘신 주에서 양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투표가 강행된 것이야말로 가장 소름 끼치는 소식이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감염 우려로 민주당 소속인 토니 에버스 위스콘신 주지사가 투표일 하루 전인 6일 경선투표를 9일로 연기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자 공화당이 다수인 주 의회가 크게 반발했고, 급기야 보수색채가 짙은 주 대법원이 반나절 만에 이를 무력화하고 7일 ‘위험한’ 투표가 강행됐다. 


게다가 시민단체들이 제기한 선거연기 소송에서 연방지방법원은 부재자투표 기한을 13일까지로 일주일 연장했으나, 연방대법원이 이를 5대4의 판결로 뒤집어버렸다. 문제는 부재자투표 신청을 한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날까지 투표용지조차 전달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유권자들은 투표를 포기하던지, 감염 리스크를 감수해가며 180개 지정투표소 가운데 문을 연 다섯 개의 투표소 중 한 곳을 찾아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쉽지 않은 결정을 강요받은 셈이다.


이게 왜 무서운 소식일까? 우리가 아는 미국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보여주는 일례이기 때문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언젠가 끝날 것이다: 경제 역시 언젠가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한번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상실할 위기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사망하는지 알고 싶다면 지난 10년 사이에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헝가리에서 발생한 사태를 눈여겨보라.


지난 2011년, 헝가리의 백인 민족주의 정당인 피데스(Fidesz)는 집권당의 지위를 이용해 선거제도를 조작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길을 터놓았다. 피데스는 우호적인 기업들에게 이권을 안겨주고, 비판 세력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한편 독립적인 언론매체의 숨통을 조이는 방식으로 당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헝가리의 실질적 독재자인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연성 권위주의’(soft authoritarianism) 통치방식을 택하는 듯 했다. 겉치레에 불과하지만, 그가 이끄는 정권은 부분적으로 민주적인 형태를 유지했고, 반대세력을 무력화하고 벌주긴 했어도 체제 비판 자체를 불법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팬데믹이 발생하자, 헝가리 정부는 이를 빌미로 오르반 총리에게 초헌법적인 비상행정명령권을 쥐어 줬다.


설마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말한다면, 그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다. 이곳에서도, 특히 주 차원에서 이미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위스콘신이 대표적인 예다. 주 의회와 사법부를 장악한 공화당이 보수색이 우세한 연방대법원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권력을 영구화하는데 골몰하면서 위스콘신은 ‘미시건호반의 헝가리’로 달음질치고 있다.


이제까지의 스토리는 이렇다: 2018년, 유권자들은 대거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민주당 주지사를 택했고, 유권자 중 53%가 주 의회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위스콘신 주의 선거구는 공화당이 장악한 주 의회에 의해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뀐 상태였고, 이로 인해 민주당은 과반수의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의석의 36%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공화당은 주지사 당선자와 협치를 시도하기는커녕 주지사의 권한을 극적으로 축소하는 조치를 연이어 취해 그를 무력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후보 경선투표일이 다가왔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비록 버니 샌더스의 경선 중도하차로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관심의 초점은 민주당 경선에 집중됐을 터였다. 위스콘신 선거에는 주 대법관 의석 한 개도 걸려 있었다.


하지만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위스콘신에도 주지사의 자택대피령이 발령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공화당 주 의원들이, 결과적으로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정상적인 상황에서처럼 선거강행을 고수한 이유가 무엇일까. 자택대피령으로 대다수의 투표소가 폐쇄된 민주당 성향의 도시 지역이 위스콘신 주의 지방, 혹은 외곽 지역에 비해 투표에 큰 지장을 받게 된 것이 주된 이유다. 위스콘신 주의 공화당은 노골적으로 팬데믹에 편승해 그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은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사실상 박탈한 셈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위스콘신에서 본 것은 공화당의 축출을 원하는 대다수 유권자들의 의사를 거슬러가며 권력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건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화당과 그들의 노력을 지원하는 연방대법원의 당파색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는 침묵을 지켜야할 대목을 요란스레 발설했다: 만약 사전투표와 우편투표 확대를 허용한다면 “이 나라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공화당원을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라고 떠벌린 것이다.


조만간 전국적인 차원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과연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올해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만연한 유권자 억압 덕에 대의원을 끌어모아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니, 설사 그가 깨끗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우리가 이미 신물 나게 목격했던 바처럼 트럼프는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 그가 미워하는 정적들을 제재하려들 것이고, 공화당은 그의 이 같은 행동을 전폭적으로 뒷받침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헝가리의 완전한 복사판으로 전락할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진다면. 그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다. 그는 수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들이 투표를 했다는 등의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조 바이든이 선거사기에 힘입어 당선됐다고 주장할 것이다. 만약 폭스 뉴스까지 그의 현실부정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질병이나 경기침체보다 위스콘신에서 발생한 일이 필자를 겁먹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위스콘신 사태는 미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가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권위주의적 지배가 코앞에 다가 와 있다.

                (서울경제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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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16 14: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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