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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은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조선 오백 년 역사 속에서도 가장 비극적 시대였으며 밤하늘의 운석 같은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해간 시대였다. 네 번의 사화가 연이어 일어났고 훈구파가 물러나면서 사림파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16세기에 지배체제가 동요하는 와중에도, 지배계층은 사회변화의 흐름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양반과 상민의 구분을 확연히 하고 서원과 향약을 통해 지배신분으로서의 특권을 강화하는 등,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절대적 도덕규범으로 확립해 갔다. 당시 체제유지의 사상적 바탕이 된 성리학은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강조하는 정치사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리학이 조선에 수용되어서는 파벌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형적인 정치현실을 낳았던 것이다.

이황과 조식 그리고 서경덕의 학문을 추종하는 유성룡, 정구, 오건, 허엽, 이산해, 최영경, 우성전, 정인홍, 이발, 김성일, 김우옹 같은 동인은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라면서 이이를 비롯한 서인을 모두 소인으로 몰아 정계에서 축출하려 하였다. 반면에 동서 분쟁의 중재를 위해 노력했던 이이는 “심의겸은 자신의 덕과 힘의 한도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 문제이고, 김효원은 선배를 깔보고 사림을 두 편으로 갈라놓은 것이 문제”라면서, “모든 비판의 초점이 선배 사림들에게 두어지고 동인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시류에 편승한 무리들이 앞다투어 동인에 합류하고 있다”라며 당시의 현실을 개탄하였다.

이어서 이이, 성혼과 학맥을 같이하는 정철, 김계휘, 송익필, 박순, 윤두수, 조헌 등의 서인 역시 동인으로부터 강도 높은 압력을 받으면서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는데, 그 시기는 학문적으로 영남학파인 이황의 주리론이 세를 잃어가고 기호학파였던 이이와 성혼, 박순 등의 주기론이 설득력을 더해가던 시대였다. 이로부터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두 세력이 첨예하게 갈려서, 피로 얼룩진 기축옥사를 불러오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은 긍정적인 면도 많았지만 이처럼 당쟁을 파생하는 등 부정적인 면을 더욱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한 예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한 반면, 동인 김성일은 침략의 조짐이 없다고 보고한 것을 들 수 있다. 국가의 안위마저도 당리당략에 눈먼 상반된 두 보고에 묻혀버려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이의 사망 후 서인은 점점 정계에서 배제되고 동인의 시대가 열렸는데 오래가지 않아 동인 역시 남ㆍ북인으로 갈라졌다. 동인 중 이황의 문인들은 남인이 되고 조식의 문인들은 북인이 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기축옥사에 조식의 문인인 최영경(崔永慶)이 연루되어 죽었음에도 유성룡을 비롯한 이황의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기축옥사를 규탄하지 않고 오히려 서인들과 함께 정권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들은 그들을 정치적 동지로 보지 않게 되었다.

 

담양 소쇄원


                               담양 소쇄원 

                         16세기 조선은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조선 오백 년 역사 속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시대였으며 밤하늘의 운석 같은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해간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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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09 2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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