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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헐버트, 독립신문 산파역

국가와 국민 위한 언론 역할 중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전 JP모건은행 한국 회장)

 

1886년 호열자(虎列刺)로 불리던 콜레라가 창궐해 조선이 초토화됐다. 조선 최초의 관립 근대학교인 육영공원 교사가 되기 위해 그해 7월 5일 조선에 온 미국인 호머 B. 헐버트(1863~1949)는 7월 29일 미국 신문 ‘리퍼블리컨(The Republican)’에 콜레라 상황을 기고했다. 


그는 부산의 일본인 선원 거주 지역에서 콜레라가 발생해 전국적으로 확산했다고 썼다. 당시 서울 사대문 안에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고 서쪽의 소의문(서소문)과 동쪽의 광희문을 통해서만 성 밖으로 시신을 치울 수 있었다.

성문이 열리는 새벽이면 두 대문 앞에 시신이 즐비했다. 덕수궁 근처에서 숙식하던 헐버트는 새벽이면 소의문으로 달려가 시신을 일일이 헤아렸다. 20여 일 동안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며 서울의 희생자 수를 추정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도성 안팎 인구 30만 명 중 10분의 1인 3만 명이 콜레라로 희생됐고, 전국적으로는 수십만 명이 숨졌을 것으로 어림잡았다. 헐버트는 이 기고문에서 조선의 위생관념 부족, 병자를 집 밖으로 내치는 관습 등으로 큰 재앙을 맞았으나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독교 국가들이 앞장서서 조선을 도울 것을 호소했다.

헐버트는 이후 1년간 조선의 정치·풍광·문화·관습 등에 관해 12편의 글을 미국 신문에 기고했다. 23세 서양 청년이 조선의 대변인을 자임해 조선을 체계적으로 외부세계에 소개했다. 청나라의 횡포를 고발한 기고문에서 그는 “조선은 청나라의 장난에 놀아나지 말고 주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외국인이지만 조선을 위한 글을 쓴 것이다.

헐버트는 1893년 감리교 출판기관인 삼문출판사 책임자가 되면서 활자를 음절 중심에서 자모 중심으로 바꿔 서적 가격을 3분의 1이나 낮췄다. 이 땅에 한글 출판 시대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의 숨은 산파였다.

앞서 1895년 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헐버트에게 신문 창간 의향을 밝히며 도움을 요청했다. 윤치호와 신문 창간을 논의하던 헐버트는 서재필의 요청에 호응해 신문 제작에 필요한 시설과 인력을 제공했다.

독립신문은 한글판뿐만 아니라 영문판도 발행해 외국인 독자들에게 조선을 알렸다. 헐버트는 신문 강령을 담은 영문판 사설에서 “조선은 조선인을 위한 조선이어야 하고, 부패를 추방해야 하고, 한글 사용을 창피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교과서를 하루빨리 한글로 보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는 헐버트의 평소 지론이자 조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헐버트는 이후 감리교 대표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와 함께 1897년 1월 조선에서 두 번째 순 한글 신문인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했다. 이어 1901년 1월엔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한국평론’을 통해 대한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전하면서 주변국들의 횡포를 고발했다. 특히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주의와 부당성을 강하게 질타하며 언론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가 국제적으로 일본을 비난하자 일본은 다각도로 헐버트를 위협했다.

헐버트는 지금껏 건국훈장(1950년)과 금관문화훈장(2014년)을 함께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50년을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저술하는 등 한글 자강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개화기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도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 진정으로 조선의 국익과 조선인의 문명 진화를 위해 글을 썼다. 4월 7일 신문의 날은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해 1957년 제정했다. 헐버트가 124년 전에 외친 것처럼 코로나19 국난 상황에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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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07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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