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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조선에서 과학자로서의 업적이 뚜렷한 분입니다. 다산이 과학에 관한 관심을 두게 된 해는 1789년 정조 임금의 두 가지 시책, 한강에 배다리(舟橋) 건설, 1793년 수원 화성 설계와 관련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89년은 다산 나이 28세, 대과에 급제했을 때입니다. 

 다산 정약용

다산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 당시 시대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수원 화성을 설계하기 직전인 1792년, 퇴계 사후 222주년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안동 도산서원에서 특별과거시험이 치러집니다. 이 시험에 영남지역 유생 7,228명이 몰려와 응시합니다. 영의정이 채제공이 이를 기념해 <도산시사단비명>을 짓습니다. 이 비문에 “지금 영남 선비들은 사학(邪學)에 물들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어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한 사학(邪學), 즉 사악한 학문이 뭐겠습니까? 서학과 양명학 등등입니다. 퇴계가 양명학을 이단시하고, 노자와 장자까지 폄훼했으니, 이 말은 퇴계 문도로서는 당연한 주장일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영남에서 성리학 말고, 실학을 하는 것은 어림없다”는 말입니다. 

다산초당


그런 차원에서 보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겠습니다. 1801년 장기로 유배 간 다산이 황사영 사건으로 강진으로 이배 됩니다. 다산이 포항 장기에서 유배 시절을 내내 보냈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까요? “500여 권의 저술? 저는 어림이 없거나 암담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도산서원

과학사상과 의학 분야에 업적을 낸 다산의 학문에 토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산은 근 30여 년 이상을 전라도 영향력(권)에서 살았습니다. 본향이 전남 신안 압해(압해정씨), 해남 출신 어머니 슬하에서 9년, 청년 시절 3년 전남 화순에서의 생활(아버지 정재원이 화순현감 때), 그리고 강진 18년 유배 생활까지, 전라도에 살면서 그 기질을 갖춘 것이죠. 게다가 서학을 수용하게 됩니다. 1784년 이벽과 이승훈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게 됩니다. 다산 나이 23살 때입니다.

 수원 화성

다산의 기질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인이었던 청년정약용은 서인계 학문을 지지합니다. 생원시에 합격한 정약용은 한양에 머물면서 정조의 지시로 『中庸』 80여 조항의 질문서 기초강의를 했는데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변(辨)’과 관련해 율곡 이이의 설을 지지합니다.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변(辨)’에 대해 기발(氣發)을 주장한 율곡의 설을 지지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성균관에 동재(東齋)에 영남 남인계, 서재(西齋)에 기호 서인계 학생들 거처하는데, 당시 동재의 학생들은 퇴계의 사단이발(四端理發)의 설을 지지했는데 다산이 다른 주장을 한 것입니다. 

다산의 답은 당시 큰 논란거리였습니다. 난리가 난 것이죠. 이다기다 논쟁은 곧 파당으로 갈릴 때였습니다. 

남인계 학생들은 율곡의 학설을 지지한 다산을 비방합니다. 그런데 정조가 “정약용의 강의 오직 마음으로만 헤아렸기 때문에 견해가 명확하다”라고 정리해 일단락됩니다. 이게 계기가 됐던지 다산과 정조, 두 사람은 군신(君臣)이면서도 학문적 동지(同志)가 됩니다. 

 

다산의 또 다른 개방적 면모도 있습니다. ‘향(鄕)’이란 단어는 전원의 풍경이 펼쳐진 고즈넉한 시골을 연상하는 단어인데, 다산은 “‘鄕’에 고착된 함의는 주자가 오독해서다”라고 지적합니다. 다산은 ‘鄕’은 정치와 교육/교화의 주체인 선비(士)의 거주 공간, 도성 내에 위치한다고 합니다. 

다산은 ‘鄕’을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知人’의 공간으로, ‘遂’를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안민(安民)’의 공간으로 생각합니다. ‘6鄕制’를 주장합니다. 이는 당대에도 파격적인 주장입니다. 다산이 해배된 후 신작(申綽)이라는 분을 찾아가 ‘6鄕制’에 관해 논쟁을 벌입니다. 

 「오학론」에서 제대로 성리학을 저격합니다. 「오학론」, 다산은 다섯 개의 학문을 그대로 두고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중 첫 번째의 학문이 바로 ‘성리학’이었습니다. 다산은 “성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공리공론에 빠져서 대를 이어 가며 논쟁하고 있다”고 일갈합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이야기까지 했을까요? 다산시대 전후 과연 조선에서 과학이나 의학을 할만했을까요. 또 조선에서 과학과 의학은 어떻게 취급되었을까요? 또 누가 이를 귀중히 여기고 또 이를 망쳤을까요?

 

흔히 조선왕조 500년을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훈구파가 기득권으로 득세한 100년과 훈구 세력이 사림을 괴롭히는 50년, 그리고 사림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해 과학을 초토화한 350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사림이 등장할 때 훈구 세력은 기득권, 사림은 참신한 개혁 세력을 기치 삼았습니다. 지금 처지에서 냉정히 살펴보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훈구파 시대가 좋았습니다. 훈구 세력 시대에는 그래도 실용적인 학문에 익숙했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禮도 형식적이었습니다. 주체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우리 조상인 단군을 모십니다. 특히 훈구파는 과학기술을 존숭합니다. 한글을 창제하고,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또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해 대량으로 서적을 인쇄합니다. 상공업을 육성해 시장을 확대하고, 부국강병을 위하는 길로 갑니다. 세종 때를 생각해 보시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림이 지배한 조선은 암흑기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퇴계 이후 조선이 힘든 길로 갑니다.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왕수인이 죽은 지 40여 년이 지난 1566년쯤 퇴계 이황이 논문을 씁니다. ‘전습록 논변’입니다. ‘전습록’은 왕수인의 어록을 모은 책입니다. 퇴계의 논문 결론은 “감히 방자하게 선유(先儒: 주자)의 정론을 배척하고 함부로 방불한 여러 학설을 인용하여 억지로 끌어 붙이면서 조금도 기탄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논문은 아마 이게 아닐까 합니다. 퇴계는 양명학을 “앞뒤 말뜻이 부합하지 않는(與前後語意不相諧應·여전후어의불상해응) 학문”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 이후 퇴계파를 중심으로 양명학을 이단으로 취급하고 노자와 장자서 마저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면서 학문 절망 시대가 도래합니다. 

과학은커녕 스스로 만든 과학기술 사용법을 다 까먹는 참극이 벌어집니다. 성리학 이외의 일체 학문을 치워버립니다. 이다기다 등 철학 베틀에 몰입합니다. 퇴계가 만든 학문 암흑의 시대가 전개됩니다. 

 

선조도 한때 정신을 차립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593년 7월 선조가 경안군 이요에게 ‘왕수인’과 ‘양명학’에 대해 전해 듣고 영의정에게 “왕수인에게 오늘날을 맡긴다면 적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다. 왕수인은 재주가 높아서 재질이 낮은 조선 사람은 배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영의정이 정색하고 반박합니다. 

선조가 재차 “왕수인은 도덕과 지식은 타고난다(致良知·치양지)고 했다. 무슨 뜻인가?”라고 묻습니다. 

이 영의정이 단호하게 “거짓입니다!” 말합니다. 

선조에게 “양명학이 사악하다”고 거듭 주장한 이 영의정은 바로 퇴계의 애제자 유성룡입니다.

 

오죽했으면 전쟁에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선비들이 “명나라 문묘에는 왕수인을 모시는데 왜 조선 문묘에는 왕수인이 없냐?”거나 “성리학 종주국인 중국도 요즘 성리학을 안 하고 양명학이 풍조를 이뤘는데 왜 조선은 아직도 성리학 세상인가?”라고 궁금해하자 세자 시강원 선생들까지 팀을 꾸려 “성리학이 양명학보다 좋다”고 중국인들을 설득하려 듭니다.

 

퇴계 이후 퇴계 문도들을 중심으로 왕수인을 철저히 이단으로 몰아갑니다. 성리학을 신봉하고 이 외의 양명학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몰거나 ‘사문난적’으로 취급합니다. 실록에 “왕수인은 이단의 학문으로 죄를 얻은 자라 그 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고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노자와 장자마저도 봐서는 안 될 책으로 취급합니다. 학문의 퇴행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훗날 양식 있는 선비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행색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 이후 이요, 최명길, 장유, 유형원, 박세당, 윤휴, 윤증, 최석정, 정제두, 양득중 등 선각자들이 무던한 노력 하고 있었지만, 다산이 활동했던 정조 때도 달라진 게 거의 없었습니다. 영조 때 양득중이 <반계수록>을 소개하고 정책서로 채택하자는 주장은 목숨을 건 엄청난 일이었지만 반짝했을 뿐입니다. 또다시 성리학 존숭 세상으로 돌아 가버린 것이죠. ‘문체반정’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대대적인 검열의 시기입니다. 사상을 검열하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런 학문의 제약은 다산이 펴낸 책도 사실상 금서가 됩니다. 

다산시대에 나온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그 당대에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임금 정조가 “몹쓸 책”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열하일기는 겨우 1900년에서야 발간됩니다. 

다산의 대표저술인 목민심서도 1902년에야 발간되고,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1966년에야 빛을 봅니다. 

이들 실학자는 모두 반계 유형원의 저술에 영향받은 학자들입니다만, 그들 역시 암담한 성리학 굴레에 잠을 자게 됩니다. 

 

학문이 사라진 조선은 암흑의 시대 그대로였습니다. 당시 해외에서는 조선을 어떻게 봤을까요? “성리학으로 과학이 사라진 나라”라고 봤습니다. 

1896년 조선 문헌 연구가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은 “조선은 유교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과학 정신이 없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또 조선을 여행한 일본인 혼마 규스케는 “일본의 옛 역사를 밝혀준 조선이, 주자 외에는 관심 두지 않아 영웅호걸을 아는 자가 없는 나라로 전락했다”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연암 박지원도 자기 아들에게 ”인순고식 구차미봉’이라는 이야기합니다. “인습을 못 벗어나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땜질하는 태도!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

요즘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퇴계가 학문을 신장한 장본인으로 우리 지성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게 바뀌지 않은 한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다산이 성리학을 극복하려는 ‘계기(契機)’에 대한 연구나 분석이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전라도 토양이 다산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는 생각이고, 영남의 선비 퇴계 중심의 성리학 존숭과는 다른 호남 선비들의 학문 수용 태도에 대한 논의도 중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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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4-25 16: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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