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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37> 군림하거나 무릎 꿇거나 하는 문화
  • 기사등록 2022-06-13 23:43:37
  • 기사수정 2022-06-13 23: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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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국의 대학 강의실에서 한국 학생들은 별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교수도 학생들이 질문하는 걸 그리 반기지 않는 것 같다.  

대한민국 국회가 주관하는 청문회는 어떤가? 청문회장에 불려 들어온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넉넉하게 주는 일이 드물다. 청문회란 말을 들어보자고 여는 것인데, 질문하는 국회의원들이 진지하게 듣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 오히려 고함치기와 윽박지르기에 가깝다.

 

한국 사람들로 구성되어 진행되는 각종 회의 분위기 역시 별로 활발하지 않다. 어쩌다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에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말한다. 의견을 길게 말하거나 다소 이색적인 의견을 제시하면 ‘분위기 파악 못하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찍히기 십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토론회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치 않다. 게다가 조금 열기를 띨 만하면 주제에서 벗어나 엉뚱한 인신공격이나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일쑤다. 

 

질문이 왜 중요한가? 질문과 대답을 통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오해한 부분이 풀어지고 밝혀지기 때문이다. 사실과 뜬소문이 판가름 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활발한 의견 교환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견을 주고받음으로써 문제의 실상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문제의 전모가 좀 더 잘 파악되면 보다 합당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도 도움이 됨은 물론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한국 사회는 이런 열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사회는 왜 이처럼 닫힌 분위기가 지배하는가? 왜 제대로 된 질의응답이나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가? 

 

여러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위계(位階)’를 매우 중시하는 우리 문화의 특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의견을 말하는 사람 또는 내게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나보다 ‘높은가 아니면 낮은가’ 하는 잣대를 부지불식간에 들이댄다는 말이다. 판단 대상인 상대자는 딱 두 가지로 명쾌하게 갈려진다. 상대자는 내가 그 위에 군림함이 마땅한 ‘하위자’이거나, 아니면 내가 그 앞에 마땅히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위자’,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는 이분법이다. 

 

세간에 말 많은 ‘갑을 관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선후배 따지기, 나이 위아래 헤아려보기 행태가 심심찮게 보인다. 서울 한복판에서 가벼운 차량 접촉사고가 나도 생면부지의 상대와 누가 나이가 많고 적은가를 가리려고 드는 모습이 이따금 눈에 띄지 않는가.

 

대단치 않은 일과 관련해서도 제대로 된 해결책이나 대안을 마련하려면 폭넓은 설득력과 보편적 타당성을 갖추어야 한다. 참신한 발상이나 창의적 아이디어는 말 그대로 수평적 의견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개방적 분위기에서만 창출될 수 있다. 어떤 아이디어나 의견, 주장을 수용할 것인가를 그 합당성에 비추어 판단하지 않고 제시한 사람의 상대적 위상(位相)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건 불합리함을 넘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수직 서열화하여 바라보는 우리 사회 문화의 이런 부정적 특성은 우리 스스로가 깨닫기 어렵다. 우리 사회 구성원 거의 전부가 이런 문화적 토양에서 사회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부정적 특성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여전히 강하고 끈질기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수직적 관점과 문화가 똬리를 틀고 있는 한 엄청난 문제를 계속 야기할 폐쇄적 족쇄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위계적 관점, 즉 사람과 사람의 견해를 수평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각은 우리 사회의 참된 발전과 바람직한 변화의 장애요소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갑질’이나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갖가지 부조리나 비리 역시 바로 이런 폐쇄적이고 불합리한 토양에서 싹튼다.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사실 판단, 의견 수렴, 대안 마련, 정책 결정 등에서 ‘위계성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일시적 사회 현상이 아니라 뿌리 깊은 문화나 다름없는 것이기에 빠르게 고쳐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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