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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석열 정부가 '이명박 시즌 2' 아니냐는 시선이 많다. 윤 당선인의 친기업 행보와 실용주의 노선, 인수위 구성 등이 MB(이명박) 정부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 만큼은 다른 것 같다. MB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유행어를 만들 만큼 고집이 셌으나, 준비성만은 철저했다. MB의 역작인 청계천 복원 과정을 윤 당선인이 참고했으면 한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MB가 청계천 복원을 들고나오자 상대 후보는 "교통 혼란과 재개발 갈등을 부를 최악의 공약"이라고 공격했다. MB는 "리비아 대수로를 건설한 우리 기술력으로 청계천 복원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반박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 공사에 들어간 것은 시장 취임 1년 뒤였다.


그 1년은 집요하고도 치밀한 준비 기간이었다. 측근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은 "매주 토요일 아침엔 청계천 회의, 일요일 아침엔 교통개혁 회의를 열었다. 의욕 넘친 MB가 주말 회의 시간을 7시로 당기려 해 말리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MB는 중앙정부의 협조를 얻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직접 브리핑했다. 삭발까지 하며 극렬히 반대하던 청계천 상인 대표를 여섯 번이나 면담해 설득했다. MB의 닦달에 서울시 공무원들은 상인들을 4200여 차례나 만나야 했다.


취임 3년 3개월 만인 2005년 10월 1일 열린 청계천 '새 물 맞이'는 성대한 시민 축제였다. 노 대통령도 직접 참석해 "서울의 미래를 바꾸어 나가는 이정표적 사건"이라고 축하했다. 이렇게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청계천은 야당 시장 MB의 집권 발판이 됐다. 대통령 이명박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서울시장 이명박은 대부분 인정한다.


한 나라의 정치 상징인 대통령 집무 공간이 이렇게 급하게 결정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용산 이전이 불과 대엿새 만에 정해졌다는 설에 대해 인수위는 "2월 중순부터 검토됐다"고 반박한다. 그렇다 해도 졸속은 졸속이다. 백악관은 계획에서 완공까지 9년이 걸렸다. 부지를 정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입주는커녕 완공도 못 본 채 세상을 떴다. "청와대에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했지만, 의지만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 


이왕 용산으로 후보지를 정한 이상 일정을 짜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실천은 어렵지 않다. 국민의 공감과 축복 속에서 청와대를 나와 용산으로 간다면 임기 중반 윤석열 정부의 훌륭한 정치 이벤트가 될 수도 있었다. ('있었다'고 과거형으로 표현한 건 윤 당선인의 생각이 쉬 바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용산 이전 협조를 거절하자 당선인 측은 취임 후 당분간 통의동 사무실을 쓰겠다고 맞받았다. 광화문을 포기한 이유가 시민 불편이었는데, 통의동은 괜찮단 말인가. 잠깐만 참으라는 말은 시민에 대한 결례다. 어떻게든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오기만 읽힌다. 5월 10일 취임 당일 청와대를 개방하겠다는 계획도 서두르지 말았으면 한다. 


현 거주자가 집을 비우기도 전에 새 입주자가 들이닥쳐 이것저것 손보겠다는 격이다. 국민 곁에 돌아오는 청와대가 반갑지만, 전리품 냄새가 밴 채 돌려받고 싶지는 않다. 화합은 말이 아니라 배려의 결과다. 물러날 권력의 몽니도 문제지만, 이를 대하는 새 권력의 자세가 너무 거칠다. 그럴수록 자신들의 협량(狹量)만 도드라진다.


무엇보다 졸속 결정을 '결단'으로 미화하는 태도가 걸린다. 윤 당선인은 '어렵지만 국가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했고, 당선인의 한 특보는 "외롭고 고뇌에 찬 결정에 윤석열의 밤은 길었다"는 찬가를 올렸다. 결단은 고독할지 몰라도 결단의 과정이 고독해선 안 된다. 


결론부터 정해 놓고 지휘봉을 들고 설명하는 건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다짜고짜 일곱 자를 공약으로 내걸어 젊은 여성들의 반감을 샀던 일을 되풀이해선 곤란하다. 이런 식의 소통이라면 앞으로 5년이 불안하다. 윤석열 정치의 첫 시험대인 지방선거가 두 달 남짓 남았다. (중앙일보 2022.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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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3-28 18: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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