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은 줄기에 능선이 있으며 몸 전체에 거미줄 같은 털이 빽빽이 난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으며 싹이 나와서 덩굴식물이 아닌데도 마치 땅을 기어가듯이 자라난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게도 이런 쑥이 삼을 많이 심어놓은 삼밭 가운데 있으면 저절로 위로 곧게 자라난다.

 

여기에서 마중지봉(麻中之蓬)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이 말의 뜻은 ‘삼밭 가운데 있는 쑥’이다. 성악설의 원조로 알려진 순자(荀子)의 저서, 『순자(荀子)』‘권학(勸學)편’에 나온다. 전후를 좀 더 인용하면 이렇다. “……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거처를 정함에 반드시 마을을 가리고, 교유할 때는 반드시 곧은 선비와 어울린다. 이는 사악함과 치우침을 막음으로써 중정(中正)에 가까워지기 위함이다.”

 

하찮은 쑥도 삼과 함께 있으면 삼처럼 곧게 될 수 있듯이, 사람도 훌륭한 품성을 지닌 사람과 더불어 있으면 그런 사람을 닮아 함께 훌륭해지고 악한 사람과 더불어 있으면 역시 함께 악하게 됨을 가르친 것이다. 환경이 인간성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침을 함축성 있게 표현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교훈을 담은 고사성어로 ‘귤화위지(橘化爲枳)’가 있다. 중국 강남의 귤나무를 기후와 풍토가 다른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변하고 말듯이 사람도 주위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지나치게 고지식하게 새기면, 처음부터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또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은 말 그대로 한세상을 불행하게 살 도리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암울하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결론이다.

 

인간과 환경이 꼭 그처럼 일방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인간은 환경이 가하는 여러 가지 힘에 속수무책으로 조종당하고 굴복하게 마련인 존재인가? 위에서 인용한 쑥이나 귤나무야 식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환경에 백 퍼센트 지배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엄격히 말하면 한 포기 풀조차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잃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것이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긴 하다.

 

환경이 인간을 이리저리 주조하지만, 인간 역시 환경을 변화시키는 존재다. 인간은 환경을 온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왔다. 한마디로 인간의 역사는 그런 노력의 총합이다. 인간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 특히 자연이 가하는 집요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이기고 살아남고자 온갖 지혜를 동원해왔다. 

 

인류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단지 환경의 영향력에 수동적으로 조종당하지 않았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적극적으로 환경을 개조하고 변화시켜 왔다. 그렇게 인간이 개조하고 변화시킨 환경이 다시 인간을 변화시키는 크나큰 요소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환경과 갖는 관계가 일방적이 아니고 쌍방적, 상호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사람과 책의 관계를 간결 명쾌하게 요약해주고 있는데, 인간과 환경의 관계 역시 이와 대단히 유사하다. 그런데 ‘바람직한 환경’이라고 하면 부족함이 전혀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를테면 좋은 교육환경이라고 하면 결핍된 요소라고는 전연 없는 상황을 언뜻 떠올리게 마련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완전무결한 환경은 실제 교육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완전한 환경’은 싸워 이기거나 해결하려고 애써야 할 문제가 전무한 여건이어서 문제의식이나 고민의 필요성조차 갖지 못하게 한다. 


교육이란 궁극적으로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며 문제 해결의 길을 탐구하는 자세를 기르는 것인데, ‘완전한 환경’은 이런 걸 기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창의성이나 도전 의식은 결핍된 부분을 채우거나 장애 요소를 극복하려는 자세에서 생겨나고 길러지기 때문이다. 역사상 위인들의 탁월한 업적도 거의 대부분 결핍이나 불편함, 인간을 괴롭히는 여건을 헤쳐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 아닌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 쓰러지는 나무들은 대부분 학교나 골프장에 심어 있던 나무들이라고 한다. 이런 나무들에 대한 관리는 평소 아주 이상적인 수준으로 이루어진다. 항상 때맞춰 물을 주고 북돋워 주고 또 받침대로 받쳐 주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지치기까지 해준다. 온갖 병충해를 예방해 주는 건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나무들로서는 기를 쓰고 뿌리를 깊고 널리 뻗어 스스로를 지탱하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 올리려고 애 쓸 필요가 없어진다. 결국 겉은 그럴듯 해도 허우대만 멀쩡한 나무들이 되고 만다. 거친 태풍과 비바람을 이겨낼 재간이 없게 된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하나에서 열까지 나이가 들도록 다 챙겨주려고 애쓰거나, 그러지 못해서 부모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풀이 죽은 오늘의 한국의 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또한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이들은 환경으로부터 거의 일방적인 영향을 지대하게 받음)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기르고 교육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환경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다음 말은 두고두고 새겨볼 가치가 있다. 

“환경은 약한 사람을 지배하지만 현명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2-03-23 22:17:04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유니세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