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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32>- 경청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 기사등록 2022-02-28 12:53:46
  • 기사수정 2022-02-28 12: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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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다. “수녀님은 기도할 때 하느님께 뭐라고 말씀하세요?”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듣기만 합니다.” 

질문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시군요. 그러면 하느님은 뭐라고 대답하시나요?”

“아, 네! 하느님도 그저 들으시기만 합니다.”

 

언뜻 보기에 싱거운 말장난이나 우스갯소리 같지만, 두고두고 되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기도나 소원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우선 듣는 편의 생각에 차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존재,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을 충분히 알아서 풀어줄 수 있는 하느님조차 대답에 앞서 우선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경청하는 태도의 중요성과 가치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이야기다. 

 

전통적으로 한국 문화는 귀와 듣는 것에 대해 관심이 상당히 많았던 듯하다.

 

실 꿰는 바늘구멍을 영어에서는 ‘바늘 눈(eye of needle)’이라고 하는데, 우리말에서는 ‘바늘귀’라고 한다. 바늘구멍이 꼭 귀처럼 생긴 것도 아닌데 그렇게 불러왔다. 기계나 도구가 고장 나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영어에서 ‘작동하지 않는다(do not work)’고 표현하는 것과 묘하게 대비된다.

 

영어의 ‘뉴스페이퍼(newspaper)’도 우리나라에서는 ‘신문(新聞)’이라고 옮겨졌다. ‘뉴스페이퍼’가 ‘새로운 것(소식)들을 써놓은 종이’라는 건조한 의미를 담고 있는 데 대해 ‘신문’은 ‘새롭게 들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마시는 술도 ‘귀밝이술’이라고 일컫는다. 곧이곧대로 해석할 말은 아니지만 ‘눈 밝이 술’이라거나 ‘몸 튼튼 술’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만큼 귀(청각), 듣기를 중시했다는 방증이라고 여겨도 될 듯하다.

 

생일날을 가리킬 때도 ‘귀 빠진 날’이라고 표현한다. 기억력이 뛰어나거나 대단히 영리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총명(聰明)’이란 단어도 그렇다. 이 말은 한자에서 왔는데, 이때의 ‘총(聰)’은 ‘귀밝을 총’자다.

 

우리말의 이런 예들에서 보면 대체로 우리 문화는 귀, 즉 듣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잘 듣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던 듯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우리는 듣는 일에는 아예 귀를 막기로 작정한 듯 보이는 행태가 지배적이다. 정치, 문화, 교육, 종교, 경영, 가정 등 어디에서나 제대로 소통이 안 된다고, 아예 ‘불통’이라고 아우성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직면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발전, 번영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런데, 마치 보석이 손쉽게 발견될 수 없듯이, 지혜는 별다른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선, 엉성하고 조잡한 의견부터 정밀하고 심원한 학문적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정보와 지식이 자유롭고 활발하게 논의, 교류되어야 한다. 지혜는 이런 논의와 교류의 과정이 역동적,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토양에서 싹트고 자라나서 숙성된다. 이런 지혜가 배태되는 바탕은 무엇보다도 경청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는 무슨 말이든지 참을성 있게, 그리고 진지한 자세로 일단 들어보는 풍토에서 성장한다.

 

정말로 말 잘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옛말도 있다. 간단히 말해 경청이 명연설보다 낫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의견이나 주장이 똑같이 온당하거나 동질적, 등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참된 지혜, 귀하고 훌륭한 견해가 있는가 하면, 한낱 쓰레기와 다름없는 정보가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다. 어쨌든, 일단 귀 기울여 들어보려는 노력이 없으면, 옥석이 뒤바뀌거나 보석이 진흙 속에 파묻혀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각 정당과 청와대, 행정기관에는 대변인(代辯人)이 있다. 해당 기관의 입의 역할을 대표적으로 수행하는 자리다. 자기가 맡은 조직의 공식적 입장과 견해를 대표하여 공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만큼 이들에게는 절제된 언어 표현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런데 이런 대변인들의 ‘대변’조차 거칠고 경박한 표현으로 도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불필요한 감정적 자극, 소모적인 말싸움과 지리한 신경전이 반복적으로 펼쳐진다. 정치 쪽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밖의 여러 분야의 지도자들이나 국민이 단지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갖지 못함으로써 상당한 잠재적 역량을 스스로 날려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부정적인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대변인들이 경청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우선 상대편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참에 각 기관에 아예 대변인만이 아니라 경청을 전담하는 ‘대청인(代聽人)’을 두자고 한다면 너무 엉뚱한 제안이 될까. 

 

대통령 선거가 열흘도 안 남은 시점이다. 대통령 후보들이 온갖 현란한 공약을 늘어놓는가 하면 상대 후보의 발언을 거칠게 단순화하고 원색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유권자로서 후보들을 저울질해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국민여론은 물론이고 각계 전문가들의 다양한 주장이나 날선 비판을 후보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은 제일 먼저 챙겨봐야 할 검토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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