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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31>-사실과 희망을 혼동하면 안된다
  • 기사등록 2022-02-07 15:07:42
  • 기사수정 2022-02-08 18: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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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큰 충격을 받거나 버거운 문제들에 부닥친다. 이런 충격이나 문제 앞에서는 '희망 섞인 사고'(wishful thinking)로 기울어지기 쉽다. 예컨대 의사에게서 어린 자녀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부모는 거의 숨이 멎는 충격을 받는다. 이내 의사의 진단을 의심한다. 의사가 다른 환자 자료를 내 자식의 것과 혼동한 것이 아닌가 여긴다. 혹은 의사가 내 자식의 병을 오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큰 병원에서도 오진률이 높다는 언론 보도를 떠올리거나, 의사의 젊은 모습을 보고 경험이 적은 의사라 오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한다. 그리고 이런 추측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확신 상태로 자기 자신을 몰아간다. 하필 내 아이가 불치병에 걸렸음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강한 바람(희망)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희망 섞인 사고’의 전형적 모습이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에는 사실적 판단과 주관적 판단이 있다. 앞의 예에서 아이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의사의 판단은 사실적 판단이다. 의사의 판단을 의심하고 내 아이는 불치병 비슷한 증세는 보이지만 절대로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애 아버지로서 내리는 판단은 주관적 판단이다. 

이것이 애 아빠의 강렬한 주관적 희망이 반영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거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엄연한 객관적 사실을 ‘내 마음 편한 대로’ 포장, 해석한 다음 그렇게 포장, 해석된 사실을 마치 사실 자체인 것처럼 여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객관적인 사실적 판단과 주관적인 희망적 판단의 구분이 항상 명쾌할 수는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이다. 달리 표현하면,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쯤 되겠다. 이 말은 사실적 판단인가 아니면 희망적 판단인가? 

겉보기에 사실적 판단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희망적 판단에 가깝다. 인간 사회의 실제 역사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정의, 공정, 옳은 행위가 불의, 부정, 잘못된 행위를 이겨냈다기보다는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인간의 간절한 바람을 반영한 것이다. ‘사필귀정’의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만사가 ‘올바르게 종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 세계가 엄존함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인간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다. 설령 처한 현실이 삭막하고 부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길이 암울하더라도 한 가닥 희망을 품어야 한다. 언젠가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거라는 기대나 희망이 전무하다면 생물학적인 연명조차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사실과 바람을 혼동함은 참으로 위험하다. 실제의 세계는 우리의 희망이나 기대에 따라 착실히 돌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 나름의 냉엄한 질서에 따라 작동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 등 인간 활동의 모든 부문이 그러하다. 사실을 온통 희망만으로 덧칠하여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않을 때, 세계의 참모습을 엉뚱하게 인식하게 되고 결국 세상에 아무런 변화나 개선도 가져오지 못한다. 난치병이나 불치병임이 분명한데도 고치기 어렵다는 이유로 치료 가능한 병명을 갖다 붙인다고 하여 병 자체가 치료될 수는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희망 섞인 사고가 극에 달하면 ‘도박꾼의 오류(gambler’s fallacy)’를 범하게 된다. 주사위 노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주사위를 던질 때 특정의 수가 나올 확률은 언제나 6분의 1이다. 그러니까 주사위를 1만 번 던지더라도 원하는 수가 나올 확률은 매번 항상 6분의 1이라는 말이다. 노름에 빠진 사람은 이 명쾌한 확률적 가능성을 애써 외면한다. 지금까지 나올 숫자 맞히기를 여러 번 놓쳤으니 이제 그 맞힐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내 속 편한 대로’ 확신하고 계속 돈을 건다.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북한 핵무기 문제로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는가 하면 질릴 만큼 듣다 보니 사회 전체가 둔감해지는 일을 반복해왔다. 북한은 새해 들어서도 수차례 탄도 미사일 등을 발사했다. 발사 횟수만이 아니라 종류도 다양해서 전문가의 자세한 설명 없이는 그 위험성이 뭔지 일반 시민으로서는 알기조차 어렵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 동안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물론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진보, 보수는 따질 것도 없고) 여러 주장들이 나왔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목적은 대한민국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협상하기 위한 것이다.’/ ‘남북한 간에 정전협정만 체결되면 사실상 한반도의 비핵화는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미국은 어떤 경우든 대한민국을 핵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며, 만일 대한민국에 북한 핵폭탄이 터지면 즉시 북한을 타격할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태여서 조만간 붕괴한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의 핵무기도 결국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 된다.’ 

 

여기 나열된 명제들은 모두 언뜻 사실적 판단인 것 같지만 기대와 희망에 두껍게 채색, 덧칠된 희망적 판단으로 보인다. ‘긍정적 사고’라는 일견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계와 사태를 희망으로 포장하는 일은 어리석고 비겁한 태도일 뿐이며 문제를 완화,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개인의 사소한 문제에서 엄청난 세계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직면한 문제의 해법을 모색할 때 우리가 깊이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사항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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