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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장자(莊子)가 어느 날 조릉(雕陵)의 과수원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과일 나무에 까치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까치를 활로 쏘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사마귀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두 다리를 쳐들고 매미를 덮치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매미는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기분 좋게 맴맴 거리고 있었다. 사마귀가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벼르는 줄도 전혀 모르고서. 장자가 활로 쏘려던 까치를 다시 보니, 이 까치는 사마귀의 등 뒤에서 사마귀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까치는 사람이 자신을 활로 쏘아 맞히려 한다는 것을 짐작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에 나오는 우화다. 사람은 까치를 잡으려 하고 까치는 사마귀를 잡으려고 하고 사마귀는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국면이다. 불과 몇 순간이 지나면,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고, (매미를 잡아먹은) 그 사마귀를 까치가 잡아먹고, 사람이 (매미를 잡아먹은 사마귀를 잡아먹은) 그 까치의 목에 화살을 꽂을 수 있다. 물론 그 다음으로 사냥꾼인 그 사람이 맹수의 한 입 먹잇감이 되는 사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평면적으로 해석하면, 생태계의 복잡하게 얽힌 먹이사슬, 약육강식의 살벌한 자연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좀 더 심도 있는 해석은, 인간은 생명이 경각에 달린 위기에 처해서도 그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명심해야 한다는 경고로 읽는 것이다. 매우 이성적이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이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구석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자기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거나 어려운 문제의 소용돌이 또는 위기 상황의 한 가운데 놓였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무감각, 불감증 상태야말로 진정한 문제이고 위기임이 분명한데도.

 

이제 이 우화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해보자. 한 마디로, 시야가 좁으면 상황의 전모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다. 시야를 넓히려면 어떠한 사태, 상황을 보다 거시적이고 대국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미시적 관찰이나 현미경적 분석이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아니, 엄격히 말하면 이런 노력 없이는 어떠한 상황이나 문제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넓은 의미로 과학적 작업이라고 볼 수 있는 미시적, 분석적 접근은 무엇을 올바로 알기 위한 일차적 필수적 요건이다. 

꼼꼼한 관찰과 세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통 큰’ 접근은 자칫 허황한 말잔치나 신기루를 실체로 오인하는 잘못에 빠지기 쉽다. 문제는 이런 미시적, 분석적 접근만으로는 어떠한 대상이나 상황을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나무는 보면서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상식적 지평에서 실감할 수 있는 예로서 현재진행형인 남북한 갈등에서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이라든가 일본과의 외교적 대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북한의 이런저런 치졸한 소행과 어불성설(語不成說)의 억지, 일본 고위 정치인들의 숱한 망언과 황당한 수준의 발언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저네들의 그런 비상식적, 몰상식한 주장이나 행태 역시 여러 배경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올바른 주장이든 허튼 소리든 간에 모든 언동에는 발생되는 맥락이 있다. 더욱이 국가적인 커다란 문제들은 정치, 경제, 외교, 교육, 문화, 군사, 종교 등 여러 면의 다양한 요소가 뒤엉켜 불거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서, 우리는 나무 하나하나만이 아니라 숲 전체를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소한 개인적 문제도 성급하고 근시안적인 결정은 금물인데, 국가 미래가 걸린 장기적이고 거대한 문제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치밀한 미시적, 부분적 분석과 아울러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관련된 더욱 큰 전체와의 연결점에 관한 숙고와 통찰이 뒤따라야 한다.

 

넓은 시야와 조망적인 관점을 외면하고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히면 자연스럽게 사고의 유연성이 추락한다. 고집스러움은 결국 경직성을 낳고 만다. 크든 작든,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에는 다원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국가의 경제 문제나 외교 문제, 교육 제도의 개선 등에 관한 해법이나 방안 마련은 어느 것 하나 유연한 태도와 다원적 관점을 요구하지 않는 게 없다. 


흔히 ‘창의적 해결’을 들먹이지만, 유연성이 숨죽이고 있는 분위기에서 창의성이 발휘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창의성은 유연한 사고방식, 다원적 관점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한껏 발휘될 때 나타나는 것의 별칭일 뿐이다.

 

시야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 보통사람의 개인적인 소소한 문제 해결에서 한 국가의 통치에서 이르기까지. 시야가 얼마나 넓은가는 얼마나 유연하게 사고하는가, 얼마나 다양한 관점에서 볼 줄 아는가와 직결되며, 결국 문제에 얼마나 창의적으로 대응하는가 하는 면과 연결되는 것이니까. 

이렇게 보면 훌륭한 리더십이란 궁극적으로 확 트인 시야, 날카로운 안목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탁월한 지도자란 보통사람이 보지 못하는 너비까지 보고 보통사람이 흔히 빠지는 완고함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부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선수도 공을 다루는 실력이나 재간만으로는 다른 축구 선수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차이점은 단지 시야의 넓고 좁음에 있다. 세계 최고 선수들은 자신이 뛰고 있는 경기에서 맡겨진 역할을 잘 수행하면서도 언제나 경기 흐름을 전반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다른 선수들을 압도한다고 한다.

 

보다 넓은 시야를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자. 우리는 이런 노력을 통해, 설사 세상과 사물의 참모습(reality)까지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인식은 보다 세상만사의 실상(實像)과 그 거리가 좁혀질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양한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하고 변덕스러운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게 될 것이다. 

 

요즘 언론은 대통령 후보들의 다양한 공약과 분주한 행보들로 온통 채워지고 있다. 이런 후보들의 시야가 정말 시원스럽게 넓었으면 좋겠다. 아니, 시야란 단어를 들이대기가 부끄럽지 않은 그런 수준에라도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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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1-17 22: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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