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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자의 수제자인 안회가 죽자 그의 아버지인 안로가 공자에게 공자의 수레로 장사지내는 데 쓸 덧널을 마련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 “재주가 있든 없든 부모에게는 모두 아까운 자식인 것이요. 내 아들 이(鯉)가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도 (시신을) 관에 넣긴 했지만 덧널은 없이 했었소. 나는 (수레 없이) 걸어 다니면서까지 덧널을 만들지는 않았었소. 내가 대부의 말석에라도 있는 이상 걸어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요.”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아꼈고 공자가 존경심까지 품었던 제자였다. 공자가 그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그가 죽었을 때 “아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며 하늘을 원망했을 정도였다. 이성을 잃고 통곡까지 했다. 


곁에 따라간 사람이 보다못해 공자에게 “선생님이 통곡을 하셨습니다.”라고 일깨워야 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내가 통곡을 했단 말인가? 하기야 내가 안회를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이야기로 보건대 공자 당시의 예법은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를 만나려면 반드시 수레를 타야 했던 듯하다. 요즘 관행에 비유한다면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을 만나려면 초라할지언정 자가용을 타고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언뜻 생각하기에, 매우 아끼는 제자가 죽었으니 공자는 안회의 아버지인 안로의 청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처럼 보인다. 자식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던 제자가 죽었으니 관의 덧널을 마련하기 위해 그까짓 수레 한 대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법도 하다. 그런데 공자는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그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 이야기에 나타난 공자의 언행은 우리가 막연히 추측하는 성인의 모습과 사뭇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성인이라고 하면 한없이 어질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 도무지 화라고는 내지 않을 사람, 그래서 냉철하기보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의사결정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으로 여기기 쉽다. 


위 이야기 속의 공자의 단호한 모습은 이런 통념을 통째로 깨버린다. 아무리 아끼는 제자의 장례라고 하더라도, 또 아무리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의 슬픔에 공감하더라도 모든 일은 ‘적당한’ 선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던 듯하다.

 

‘적당(適當)’의 사전적 의미는 ‘꼭 들어맞음’이다.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문제에 대처하든지간에 상황이나 시점, 형편에 딱 들어맞게 하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행동하라는 말이다. 결국 ‘적당’은 ‘중용(中庸)’이라는 덕목과 사실상 동의어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적당히 한다’는 말은 어떻게 쓰일까. 원칙을 꼼꼼히 따져보거나 관련 규칙,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지 말고 두루뭉술하게 대충대충 넘어가자고 할 때 흔히 이 표현을 쓴다. ‘적당’의 사전적 정의와는 완전히 상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된 극단적 시각이 걱정스럽다. 차분한 사실 파악과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다양한 문제들과 중요한 의사 결정이나 정책 판단을 성급하게 극단적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 문제가 화두가 되면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치 자기가 지지하는 편은 ‘절대 선’이고 자기가 반대하는 편은 ‘절대 악’인 것처럼 여기는 풍조다. 이로 인해 한 사회가 온전히 성립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공동체적 분위기가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 

 

극단성은 일 처리의 속도를 한 예로 든다면 ‘무턱대고 서두름’과 ‘신중을 위해 한없이 늘어짐’의 중간인 ‘적당’을 취하지 못하고 양 극단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적당’은 평범한 것이어서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덕목의 범주에 포함시키기에도 미흡해 보인다. 그러나 적당은 한 개인의 행동에서는 물론이고 집단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다. 한마디로 적당은 우리가 사적, 공적으로 두루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다. 

 

이렇게 보면 적당은 그야말로 성인이나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적당(중용)은 통찰력(insight)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적당이나 중용은 국한된 일부의 문제에서만 유념해야 할 가치도 아니고 달성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이 점을 명심하고 우리 모두 한 개인으로서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적당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공적인 면으로 말한다면, 조직의 의사결정이나 국가의 정책 결정,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의 선택에서도 매우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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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0-18 15: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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