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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니스트






10월 10일은 북한 최대의 ‘정치적 명절’이다. ‘당 주도국가’인 북한 체제에서 조선노동당 창건일은 해마다 전 세계가 관심 속에 주목하는 날이다. 지난해 북한은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일을 대대적인 야간 열병식으로 거창하게 치렀다. 올해는 과연 어떤 ‘도발적 행사’를 벌일지 모두 주의 깊게 지켜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북한은 의외의 모습을 선보였다. 기념일인 10일 그동안 해오던 대규모 열병식이 아니라 인민을 강조하는 김정은의 기념연설로 대체했고, 이튿날인 11일 ‘국방발전전람회’를 개최하는 형식으로 완전히 틀을 바꿨다.

‘국방발전전람회’는 많은 나라에서 개최하는 ‘무기박람회’를 연상케 한다. 외부세계에 호전적으로 비치는 열병식 보다 한결 유연해 보인다. 경비도 아낄 수 있다. 저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연출이겠지만 그리 나쁜 모습은 아니다.


 열병식에서 기념연설과 ‘국방발전전람회’로, 유연하게 바뀐 당 창건 기념


형식도 형식이지만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연설을 했다.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 기념연설에서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특정한 그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라고 공언한 것이다. 전 주민이 보는 <노동신문>에도 보도됐다. 한국과 미국을 향해 ‘주적’이 아니라고 한 것은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중요한 발언이다.


북한은 지난해와 올해 韓美에 대해 ‘적’이란 표현을 썼다. 지난해 6월 북한은 ‘대남 사업’을 ‘대적 사업’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비난하며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파괴까지 감행했다.


올해 1월 노동당 8차대회 연설에서도 김정은은 ‘최대의 주적’이자 ‘기본 장애물’인 미국을 제압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번에 ‘주적’이 아니라면서 “우리는 전쟁 그 자체를 방지하고 국권 수호를 위해 전쟁 억제력을 키우는 것”이고 “분명코 남조선을 겨냥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고 언급했다. 국방력 강화가 ‘공격’이 아닌 ‘방어’ 목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핵’ 관련 언급도 전혀 하지 않았다.


한미에 ‘이중기준’ 및 ‘대북 적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조건은 여전히 달려 있지만 이런 언급과 전반적 흐름은 여러 관측을 불러일으킨다. 전반적으로 한반도에서 위기가 급격히 고조될 가능성은 낮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남북관계나 북미관계가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북한이 미국과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인 대화에 나설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김정은은 전날 연설에서 “미국은 최근 들어 우리 국가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신호를 빈번히 발신하고 있지만 적대적이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 행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고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


임기 말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유엔총회서 제안한 ‘종전선언’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서 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종전선언 문제 등을 조율하기 위해 방미했다. 그는 취재진 질문에 “어차피 비핵화 협상이 진행된다면 제재 완화 문제도 같이 논의돼야 하는 사항”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미국은 원론적인 태도만 보이며 대북제재 해제 문제에 대해선 완강한 태도를 유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모처럼 용기를 내 밀어붙이니 동맹국 원수 체면을 봐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뿐이지 한반도평화나 문 대통령 노력을 진정 지지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의구심이 솟는다.


    금강산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마지막 용 써야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문 대통령의 막바지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남북과 미국, 중국이 함께 풀어야 할 한반도 평화협정 추진은 첫발도 떼지 못한다. 평화협정과 비핵화의 입구에 해당하는 종전선언 추진조차 만만치 않아 보인다. 자칫하면 차기정부에 험악한 남북관계를 물려주지 않는 수준으로, 기껏 4차 남북 정상회담을 여는데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특단의 결기와 돌파력이 필요하다. 마지막 용이라도 써 봐야 한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 백신지원을 포함한 인도적 대북지원과 함께 남북 정상 간에 합의했던 금강산관광 재개나 개성공단 재가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바란다.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킨 금강산관광 중단과 개성공단 폐쇄는 사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통탄스런 패착이다.


미국의 ‘재가’를 기다리다보면 모처럼 어렵게 만든 기회를 또 헛되이 날리기 쉽다. 굳은 의지와 돌파력이 아쉽다. (내일신문 202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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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0-14 17: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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