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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남북 정상회담 의제가 오랜만에 다시 떠오르고 있다.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9월 25일 "공정성이 존중된다면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할 수도 있다"고 과감하게 발언했다. 이 정도 발언이라면 오빠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사전에 조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13일 순항장거리미사일, 15일 철도기동탄도미사일, 28일 동해상 단거리 미사일, 29일 극초음속 신형미사일 등 미사일 발사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을 분석하는 이른바 내재적 연구 방법에서는 이 같은 이중성에 대해 대화는 통일전선부 업무에 속하고 군사행동은 노동당 및 군부의 작전 부서가 담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국가로서 대외정책이 통합되지 못하고 모순 구조 속에 방임되고 있다는 불신감을 피할 수 없는 배경이다.

북한의 이중적 행동이 있었지만 남북대화와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대중 대통령(DJ)의 경험이 떠오른다. 그는 북한이 부정적인 행동뿐 아니라 긍정적인 신호도 보이기 때문에 두 가지 측면에 대해 분리 대처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DJ는 1999년 2월 12일 미국 유력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북 포용정책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것으로 그의 정책철학이 미국 여론층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전 정부는 북한이 군사행동을 하면 진행 중인 모든 남북 교류협력을 중단했으나 DJ정부는 정치 군사와 경제협력을 분리함으로써 교류협력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또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등가성과 동시성이 아닌 비대칭적이고 비동시적 상호주의를 제시했다. 

북한에 많이 주고 적게 받아도 한반도 평화가 정착된다면 세계 글로벌 기업의 투자가 크게 유입돼 국익은 더 증대된다는 정책철학이었다. DJ정부는 출범 후 북한이 1998년 6월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 1999년 6월 서해 남북해군 교전과 금강산 주부관광객 억류 등 부정적인 행동을 보였음에도 대북 포용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이렇게 인내한 끝에 그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해 냈고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의 길을 열었다. 6·15 선언은 맨 앞에 있는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원칙"을 두고 국내 언론들의 비판을 받았다. 북한의 폐쇄적인 자주 노선을 그대로 따라간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었다.

이에 대해 DJ는 "김정일 위원장이 자주 원칙을 반외세나 미군 철수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자주란 이제 미국 일본과 중국 러시아에 적극 외교를 펴서 외세가 불합리하게 개입하지 않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김 위원장이 동의했다"고 밝혔다. '신자주'의 새로운 노선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그후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 2일~4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한 해 김정은 위원장과 세 차례 연속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중 문 대통령이 9월 19일 15만여 평양시민으로 가득 찬 능라도 5·1체조경기장에서 7분여 동안 행한 감동에 찬 연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그림을 내딛고자 제안합니다." 평양시민들은 남쪽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남쪽 일행과 백두산 천지에 동행한 김 위원장이 "제가 사진 찍어드릴까요?"라며 카메라에 손을 내미는 TV 영상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문 대통령은 "북한의 담화와 미사일 발사를 종합 분석해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이중성에 긍정적 대화 움직임과 부정적 군사행동을 분리해 대처한 DJ의 경험이 지금도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매일경제 2021.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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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0-03 12: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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