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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24- 콜베 신부와 히틀러 사이의 거리
  • 기사등록 2021-08-31 14:50:47
  • 기사수정 2021-08-31 14: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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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막시밀리안 콜베(1894∼1941)는 폴란드의 사제였다.  1941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그가 갇혀 있던 감방에서 한 포로가 탈출했다. 수용소 규칙에 따라 그 감방의 포로 10명이 아사형(餓死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 끔찍한 형벌을 받도록 지명된 사람 중에 중사 한 명이 있었다. 


그 중사에겐 자신이 아니면 돌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처자식이 있었다. 중사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콜베 신부는 수용소장에게 자신이 그 중사를 대신하여 처형 받겠다고 간청하였다. 대신 죽게 해 달라는 콜베 신부의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졌고, 결국 그는 아사감방에서 15일간 굶주림을 당한 다음 독약주사를 맞고 죽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2년에 그를 성인으로 시성(諡聖)한 사실을 굳이 덧붙이지 않더라도 그는 말 그대로 ‘성인’, 즉 신처럼 거룩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헌신이나 희생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덕목이라는 주장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육 수준에서도 봉사나 희생은 항상 강조하고 또 끊임없이 교육하지 않는가.

 

그러나 말이 쉽지 자잘한 봉사와 사소한 희생 수준을 넘어 하나 뿐인 자신의 생명마저 내던지는 일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실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꼭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려움에 처하면 우선 나만이라도 살아야겠다고 몸부림치는 게 우리의 적나라한 정신적 실상이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수많은 동물 종(species) 중에서 생김새나 성질이 가장 다양한 것은 개라고 한다. 크기로 말하면, 개는 다 커도 생쥐만큼 작은 것부터 송아지만큼 큰 것까지 실로 다양하다. 똑같이 ‘개’라고 부르지만, 털로 말해도 몸이 온통 긴 털투성이인 종류가 있는가 하면 털이라고는 별로 없고 반들반들한 거죽으로 싸여있는 것도 있다. 

 

사람은 어떨까? 외형상으로는 동물의 다른 종보다 오히려 다양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피부색, 인종, 키, 몸무게, 생김새 등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다양성은 그 편차가 그리 큰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인성적인 면과 능력의 면에서 인간의 편차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가 난다. 특히 인성적인 면, 즉 옳음을 실천하는 일과 관련지어 따져보면, 인간성의 스펙트럼은 그 폭이 대단히 넓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콜베 신부는 신화나 전설, 또는 소설 속의 허구적 인물이 아니다. 죽은 지 70년 정도 밖에 안 된, 명백히 실재했던 사람이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어떤가? 콜베 신부뿐만 아니라 수 백만 유태인을 눈 깜짝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살상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국가사업으로 계획하여 치밀하게 추진한 실존 인물이다.

 

생물학적으로 정의한다면 콜베 신부와 히틀러는 별 차이가 없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동일한 종에 속한다. 그러나 인성적인 면이나 삶의 행적으로 비교한다면, 콜베 신부와 히틀러는 도저히 똑같은 개념으로 묶을 수가 없을 정도다. 이 두 대상을 ‘인간’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지만,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인간의 양 극단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 사람은 성자고 또 한 사람은 인간의 모습을 지닌 악귀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살펴본다면 지극히 희소한 존재다. 99.99퍼센트에 속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양 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지대에 널리 분포한다.

 

이런 관찰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다소 진부한 결론이지만, 대체로 인간은 성자와 악마의 중간쯤에 있는 중간자적 존재이지만 성자나 천사로 드높게 상승할 수도 있고 또 얼마든지 악마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요약될 것이다. 

콜베 신부 쪽을 바라보면 희미하지만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도 갖게 된다. 히틀러 쪽으로 눈을 돌리면 도저히 구제될 수 없고 구제돼서도 안 되는 지옥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인간’이라는 명사가 마치 ‘극악의 덩어리’를 뜻하는 말처럼 들린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먹이를 구하고 짝짓기를 하면서 아무런 회의나 고민 없이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본능 말고도 사유하는 능력과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다.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거나 본능을 거부함으로써 능력과 도덕성을 무한히 향상시킬 수 있는 존재다. 거의 콜베 신부에 수렴하도록 개선될 수 있는가 하면, 거의 히틀러에 가깝게 극악무도해질 수도 있다. 


콜베 신부처럼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히틀러 수준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노력은 비탈을 거슬러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과 비슷해서, 주의하지 않으면 한없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인간사에 등장하는 온갖 끔찍한 일들은 한 사회나 국가의 지도자와 구성원들이 히틀러 닮은 요소를 지닐 때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사고, 태도, 행동을 부단히 성찰해야 한다. 이런 자기성찰을 소홀히 한 채로 타성이나 교묘한 자기합리화에 빠지면 모르는 사이에 비인간적인 사악의 덫에 갇히고 만다. 언뜻 소크라테스의 “성찰 없는 인생은 살 가치조차 없다”는 일갈은 지나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콜베 신부와 히틀러에 생각이 미치면 그의 이 가르침에는 우리가 명심하고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깊은 지혜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의 인격이든 특정 집단이나 국가의 품격이든 간에 저열하거나 무난함이 아니라 건전함 이상의 보다 바람직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자기 성찰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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