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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섭 / ‘아프간의 교훈’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 기사등록 2021-08-27 18:10:04
  • 기사수정 2021-08-27 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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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니스트

전 한겨레 논설위원 실장




‘제국의 무덤’이란 저주는 헛말이 아니었다. 미군의 지원을 받아온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나는 아프가니스탄 군대의 능력을 믿는다. 그들은 정식훈련을 받았고 질 좋은 무기를 갖고 있다.” 지난달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장담이 무색하게 철군시한이 지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은 11일 만에 함락됐다.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는 국민을 버리고 현금다발을 챙겨 외국으로 도주했다. 골치덩이였던 ‘아프간 수렁’에서 빠져나오긴 했으나,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아프간 정부가 11일 안에 붕괴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측 못했다”고 밝혔다.


아프간 군대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한국전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내 줬던 상황과 비슷하다. 현금을 챙겨 도주한 아프간 대통령은 안심하라는 녹음 메시지만 남긴 채 먼저 피신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그나마 외국이 아니고 국내에 남아 항전하고 끝내 정전협정으로 마무리했으니 나은 편인가?


아프간 사태는 1975년 베트남 사이공 함락 때의 상황과 정확히 오버랩 된다. 미군의 철수 양상도 남베트남 패망 때와 빼닮았다. 미국이 ‘베트남 수렁’에서 발을 빼자 수도 사이공은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고 서둘러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뤘다. 보트피플이 넘쳐났다. 남베트남을 지배하던 권력자들은 재빨리 미국으로 달아났다. 미국의 패전 원인도 비슷해 보인다.


아프간 정부는 왜 그토록 빨리 무너졌을까? 여러 이유가 중첩되겠지만 근본은 미국이 세운 꼭두각시 정권이 민심을 얻지 못한 데 있다. 아무리 돈을 퍼붓고 신식 무기를 제공해도 부패한 정부 아래서 중간에서 착복해 줄줄 새는 데는 대책이 없다. 미군이 훈련시킨 정부군이 30만이라고 하지만 지원금을 더 타내기 위해 만든 허수가 많았다고 한다. 부패가 만연한 자존감 없는 군대에 목숨 바쳐가며 충성할 사람은 없다.


  네오콘식 일방주의가 빚은 ‘잘못된 전쟁’


이슬람 근본주의 탈레반의 엄격한 교리에 옥죄어 ‘질식감’을 느낄지 몰라도 외국군의 앞잡이 부패정권보다는 낫다는 인식이 바닥민심을 좌우한 것이 아닐까. 탈레반이 마을로 진입할 때 지역민들이 저항하지 않은 이유를 톺아봐야 한다.

먹고 살기에 지친 주민들에겐 부패해 법보다 뇌물이 판치는 무법천지 보다는 악법이라도 지켜지는 ‘차악의 상황’이 낫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온갖 악조건 하에서도 탈레반은 20년을 버텼고 오히려 힘을 키워 돌아왔다.


뒤늦게 입증됐지만 미국은 애초 잘못된 전쟁을 시작했다. 전 세계를 압도하던 ‘네오콘식 사고’가 지배한 부시 행정부가 아프간, 이라크 등을 침공해 자신이 원하는 체제와 정부를 손쉽게 세울 수 있으리란 오판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악의 축’ 운운하며 편 가르기로 세계를 줄 세우던 오만과 편견이 무분별한 전쟁과 숱한 인명피해를 낳았다.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이 향후 어떤 모습을 보일지 예단하기는 이르다. 교조주의·근본주의에 물들어 공포통치를 자행하고 인권, 특히 여성인권을 억압했던 전근대적 과거 행적이 많은 우려를 낳는다.

20년 후의 탈레반은 겉으로는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려 애쓴다. 전 정권에 연계된 사람들에 대해 보복하지 않으며 여성 인권을 억압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정권 안정을 위한 ‘선전 쇼’라 하더라도 달라진 상황을 신경 쓰는 것 같다.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


  ‘한미동맹만이 살 길’ 외곬 주장 비합리적


아프간 사태는 우리와 동떨어진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우리 언론과 정치권에서 아프간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제각각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놓는다. 도저히 비교대상이 안 되는 아프간 허수아비 정부에 우리를 단순 대입하면서 ‘미군이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지 않았느냐’고 공포몰이를 하며 한미동맹 강화를 부르짖는 외곬 주장이 판을 친다.


이미 체제경쟁 상대가 될 수 없는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며 미군이 없으면 존립이 어려울 것처럼 몰아가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가학성’ 주장이다. 세계 10위 경제권, 군사력 6위권으로 떠오르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려는 우리를 비하하는 주장이다. 한반도 평화는 스스로 지켜가야 한다. 북한과 평화로운 대화·협력을 추진하는 배경이다.


한미동맹의 시의성과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주국방 능력을 키우는 한편 동맹을 통해 안보의 깊이와 너비를 확대해야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 다만 미국과 중국이 격돌하는 상황에서는 지혜롭게 처신하며 어느 쪽과도 척지지 말아야 한다. ‘균형외교’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한쪽(미국)에 단단히 밀착해야만 안전할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합리성이 결여된 편견이다.


미국 내에도 이런 극단적 주장을 펴며 한국을 압박하는 보수 논객들이 제법 많다. 군산복합체와 연관된 인사들일수록 더욱 심하다. 편향된 주장으로 잇속을 챙기려는 속셈이 엿보인다. 미국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상대방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방위비 증액과 고가의 무기 구매압력이 뒤따른다.


주한미군이 미국 국익에 반하는데도 우리를 위해 주둔한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동맹을 존중하고 우대하되 자주국방 능력을 키우며, 핵심 과제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일신문 2021.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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