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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22> 인격 존중은 도덕의 기본이다
  • 기사등록 2021-07-16 18:26:17
  • 기사수정 2021-07-16 18: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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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첨단 정보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시민은 외롭다. 많은 낯선 사람 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은 대체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썩 인격적인 대접을 받기가 힘들다. 심하게 불친절한 대접을 받지는 않더라도, 그저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로서 ‘취급’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상위자의 명령과 지시를 받고 하위자를 이끌면서 활동한다. 이런 과정에서 때로는 상위자에게서 인격 모독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위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꼭 의도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정도에서도 상당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몇 년 전 우리 사회는 ‘땅콩 회항 사건’으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최근에는 어느 고위 공직자가 부하 여직원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하는 못된 짓을 저지르다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방송과 신문이 엽기적 수준의 다양한 ‘갑질’과 어린이 학대 등으로 채워지는 일도 요즘 흔해졌다. 예전엔 개념조차 생소했던 ‘감정 노동자’의 문제도 종종 언급된다. 


자기 자식마저 애정이니 교육이니 하는, 겉으로는 제법 그럴듯한 이름으로 자신의 욕구를 대신 충족시켜줄 존재로 여기는 태도 정도는 얘깃거리조차 되지 않는 세태다. 하기야, 인격 존중을 가르치고 고상한 인격 형성을 추구하는 대학에서도 성희롱, 성추행, 인격 무시가 심심찮게 벌어지는 현실에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왜 인격을 무시하는 일이 이토록 빈번히 일어날까? 우선, 무한경쟁을 으뜸으로 삼는 사회 분위기나 문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에 눈부시게 변하고 성장했다. 경쟁은 이런 변화와 성장의 절대적 추진력으로 작용해온 게 사실이다. 경쟁 자체를 절대시하는 문화에서는 자연스레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비교하려는 경향이 압도하게 마련이다. 또한, 계량화를 통해 비교하거나 가시화하기 어려운 것들은 마치 별 가치가 없는 것인 양 여기는 풍조가 확산된다.   


아울러, 인격과 인간성 경시의 주된 원인의 하나로 급속한 산업화, 정보화 과정의 결과로 초래된,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지나친 전문화와 세분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전문화와 세분화는 부지불식간에 수단을 목적으로 전도시킨다. 조직 구조와 역할을 잘게 쪼개다 보면 일순간에 수단이 목적으로 바뀌고 만다. 당초에는 보다 궁극적인 어떤 목적을 위한 과정이나 수단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어느 순간 그 자체로서 추구할 최종 목표로 둔갑한다. 


진행의 효율화나 성과의 극대화를 위한 방편으로 도입한 것이 결국 어떠한 조직이나 집단의 궁극 목적에 관해 성찰하는 일을 봉쇄하게 만든다. 어쩌다가 조직의 궁극 목적이나 방향에 관한 질문이 나오더라도 그런 질문은 ‘쓸데없는 한가한 배부른 소리’로 간주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인간성이나 인격성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는 비집고 들어설 여지조차 없어진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누구나, 돈을 더욱 많이 벌고, 더욱 잘 먹고 잘 입으며, 더욱 편한 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 또 이런 요소를 만족스럽게 누리고자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설령 이런 목표가 온전히 달성되었다고 할 때, 그것만으로 우리가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자부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또 존중받을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함부로 짓밟힐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 존재이니까. 


한마디로, 어떠한 개인의 인격은 그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 목적이 아무리 그럴 듯하고, 높고, 설령 엄청난 이익을 가져올 수 있을지라도. 목적이나 목표를 추구하는 의지가 강하다보면,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이나 수단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쉽고, 인간조차 그런 수단으로 써먹어도 무방하다는 위험한 발상에까지 이를 수 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한 개인이나 사회가 불건전하다 병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덕의 제1조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인격은 절대적으로 존엄하므로 그 어떤 명분으로도 짓밟아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부인하거나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는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다는 말과 같은 게 아니겠는가. 


언뜻 생각하면 인격 존중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격을 무시하는 잘못이 그리 흔하게 범해지나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의 자식 사랑조차 인격이 깡그리 무시되면서 베풀어질 수 있음을 생각해보면, 진정한 의미의 인격 존중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철학자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는  인격과 관련하여 “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인격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만 여기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인간 사회는 마땅히 모든 인간 개개인을 목적으로서 대우하는 ‘목적의 왕국’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격을 존중함은 도덕의 알파요 오메가다. 우리가 아무리 가치 다원적인 세계에서 살지라도, 그리고 인격의 존엄성을 매 순간 기억하지는 못할지라도, 인격이 존귀함을, 인격은 절대적 가치를 지님을 명심하고 수시로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참으로 칸트의 주장은 아직도 보편적 설득력과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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