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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연구소 이사장






위기가 새로운 돌파구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북측의 강화된 핵무장력과 미국 내부의 광범위한 반북 정서, 그리고 심화하는 미-중 대결구도를 감안할 때, 지금 북핵 위기가 재발한다면 과거와 달리 관리 불가능한 재앙으로 번질 개연성이 적지 않다. 위기를 피할 실마리는 원론에 있다.


며칠 전 미국과 유럽의 전문가들과 북한 문제에 대한 화상회의를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북한에 대해 의아해 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조율된, 실용적, 단계적 접근을 통해 북한과 외교적 타결을 바란다는 뜻을 표명했고, 5월21일 한-미 정상회담 공동 성명에서는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의 존중, 남북 간 관여와 대화·협력의 지지, 대북특사 깜짝 임명과 같은 성의를 보였는데도 북한이 무반응을 이어가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은 최근까지 네 차례에 걸쳐 평양과 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최근에는 이제 할 일은 다 했다는 태도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반복하고 있는 ‘이제 공은 평양 쪽에 있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평양의 반응은 차갑다. “아까운 시간을 잃는 무의미한 미국과의 그 어떤 접촉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리선권 외무상의 6·23 담화가 이를 반영한다.


북한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국내 상황의 영향이 클 것이다. 코로나 방역, 식량 문제, 제재 장기화에 따른 경제 침체 등 내부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대외 행보에 나서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최근 열린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의 문책 인사 바람은 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비상방역 장기화 구상 아래 국경 지역에 콘크리트 장벽과 고압선을 설치하는가 하면, 국제기구에 백신 지원을 요청하고도 방역을 우려해 구호요원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이나 남측과의 대화보다는 내부 단속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자세도 문제다. 핵·미사일 실험으로 일관했던 2017년과 달리 2018년 대화 국면 이후 평양은 풍계리 핵실험장 파괴, 동창리 미사일 발사대 폐기 의사 표명,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자제 등 일련의 모라토리엄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국은 상응 조치보다는 징벌적 자세로 일관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4년간 27차례 이뤄진 독자 제재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이든 행정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김정은 총비서와의 정상회담이 그의 국제적 지위와 정통성을 고양해주는 시혜적 행동이라는 인식 또한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 대 선, 강 대 강’이라는 김정은의 논리 구조 속에서는 역지사지가 없는 미국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결론짓기 십상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실용주의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구체성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평양이 ‘조건만 맞으면 비핵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할 때의 조건은 ‘북의 생존을 위협하고 인민의 발전권을 저해하는 적대시 정책의 해소’다. 한-미 연합군사연습과 훈련의 중단, 미 전략무기의 한반도 전진배치 자제, 종전선언 채택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미 관계 정상화 같은 이슈를 평양은 생존의 문제로 인식한다.

인민의 발전권이라는 표현은 대북제재 완화를 가리킨다. 북측 요구의 적실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바이든 행정부는 이러한 사안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한 적이 없다. 얻을 게 분명하지 않다면, 평양의 그 누구도 빈손으로 끝나 문책을 당할 게 뻔한 미국과의 실무 접촉에 선뜻 나설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뿌리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양의 구조화된 불신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핵 협상의 우선순위를 낮게 잡고 본질적 타결보다는 군사적 억제와 동맹 공조를 통한 안정적 관리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게 북의 대미 인식인 셈이다. 더불어 바이든 행정부가 미 의회와 싱크탱크 중심으로 형성된 ‘반북 워싱턴 컨센서스’를 극복할 의도나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북·미 양측이 모두 진퇴양난의 함정에 걸려 있다. 미측이 구체적 유인책을 꺼내야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평양과, 평양이 대화에 나서야 구체적 카드를 보여줄 수 있다는 미측 사이의 간극은 크다. 다름 아닌 신뢰의 격차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위기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때로는 위기가 새로운 돌파구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북측의 강화된 핵무장력과 미국 내부의 광범위한 반북 정서, 그리고 심화하는 미-중 대결구도를 감안할 때, 지금 북핵 위기가 재발한다면 과거와 달리 관리 불가능한 재앙으로 번질 개연성이 적지 않다.


위기를 피할 실마리는 원론에 있다. 미국은 말 그대로 실용적 태도와 유연성을 보여줘야 한다. 북한 역시 국내 상황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간의 일방적 주장에서 벗어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 반전을 끌어내기 위해 창의적 외교를 펼치는 일은 다름 아닌 한국의 몫이다. 북핵 30년의 피로와 좌절감 속에서도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한겨례 2021.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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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7-12 17: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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