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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20, 승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 기사등록 2021-06-01 12:42:09
  • 기사수정 2021-06-01 12: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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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물질이 변할 때 승화(sublimation, 昇華)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물질이 고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체 상태로 변하거나, 거꾸로 기체 상태에서 곧장 고체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나프탈렌이나 드라이아이스를 공기 중에 놓아두면 상온에서 액체가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모두 기체로 변한다. 


아이오딘 결정 역시 가열하면 액체로 변하는 과정 없이 보라색 기체가 되고, 이런 기체를 냉각시키면 액체 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장 원래의 아이오딘 결정이 된다. 얼음도 0℃ 이하에서는 아무런 융해 과정 없이 기체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모두 승화 현상의 사례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승화 개념을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데 원용했다. 심리학의 ‘승화’는 꼼꼼히 따져 들어가면 상당히 까다로운 개념이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용어다. 보다 상세하고 전문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심리학적 논쟁은 한 두 마디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없다. 


하지만, 상식 수준으로 단순화해보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승화는 어떠한 본능적 원초적 충동을 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방향으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당초의 공격성이나 심리적 억압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일컫는다. 동물적인 성적 충동이나 공격적 욕구 등을 곧바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일이나 예술적 창조에 몰두한다든가 유머를 발휘하든가 하여 해소하는 경우가 이런 예에 해당한다.

 

왜 새삼스레 ‘승화’를 들먹이는가? 인간을 신과 짐승의 중간자로 단순하게 구분해본다면, 이 승화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다. 당연히, 상처를 입는다거나 안타까운 감정을 갖는 일 따위는 도저히 신과 어울릴 수 없다. 짐승은 어떨까? 엄격한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짐승에게도 낮은 수준이지만 이성이나 사고력, 충동 억제력 같은 게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설령 짐승에게 다소 이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 수준은 인간과 비교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사고력과 이성을 지니고 있지만 대단히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 또한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감정 역시 지니고 있다. 이런 어중간한 존재인 인간은 행동반경이나 감정의 폭, 충동의 표현이나 억제에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낸다. 매우 드물지만 사람은 거의 신적인 냉철함과 완전성을 드러낼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때로 짐승보다 못한 행동도 거침없이 저지른다. 결국 승화는 신에 가까운 수준과 짐승과 유사한 수준의, 양 극단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에게만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인간은 엄청난 증오심이나 불길 같은 분노, 가슴을 찢는 슬픔, 끝없는 안타까움 등의 격한 감정을 즉시 서슴없이 쏟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강렬한 정서들을 다양하게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억제하기 어려운 강한 감정과 충동을 춤이나 노래로, 예술작품으로 표출하기도 하고, 고도의 집중력이나 헌신적 희생을 요구하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정화시키기도 한다.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절규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건조하게 옮기면, ‘트라우마 없는 인생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삶은 숱하게 상처 입는 일과 상처 입히는 일로 점철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처는 악의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지만 전연 의도하지 않았으나 생겨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번잡한 세상사에서 강렬한 부정적 감정, 깊은 응어리를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한 개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사회라는 공적인 채널을 통해서도 그러하다. 특히 부정적 정서들, 예를 들면 끓어오르는 분노,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슬픔이나 억울함을 해소하고자 할 때 고식적인 해결책에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 발생 원인을 따지거나 책임 소재를 규명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런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말 그대로 필수적 요구사항이다. 그러나 비극적, 부정적 문제의 해결이 이런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쓰라린 상처를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서 나타나야 한다. 그 상처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이런 요구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공의 장에서 이런 측면에 대한 성찰이나 노력 없이 공동체적인 분위기, 즉 한 사회 구성원 간에 끈끈한 유대감이 공유되는 분위기는 조성되기 어렵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말하면, 한 개인의 이런 승화 지향적 자세는 그를 숭고하고 고결한 인격체로 성숙시키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참으로 승화는 인간만이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덕목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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