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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19 / 원활한 소통밖엔 길이 없다
  • 기사등록 2021-05-03 16:50:08
  • 기사수정 2021-05-03 18: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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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있다. 매우 잘 알려진 ‘이솝 우화’ 가운데 하나인데, 그 줄거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여우가 자기 생일에 두루미를 초대하여 대접한다. 그런데 두루미가 먹을 국물을 접시에 넣어서 줬기 때문에 두루미는 전혀 먹지 못한다. 화가 난 두루미가 나중에 여우를 초대하는데, 여우에게 목이 긴 호리병에 국물을 넣어서 대접한다. 이번에는 여우가 전혀 먹지 못하게 되어 곤경에 빠진다.  


여우가 애당초 두루미를 골탕 먹일 작정으로 접시에 수프를 담아서 내 놨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우는 마지못해 두루미를 부른 게 아니라 자신의 생일에 모처럼 초대했다. 두루미가 여우가 초대한 여러 친구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게 초대받았다는 점에서 이런 짐작은 맞을 것이다. 여우의 지능이나 사고력으로는 친구 두루미가 자신과 신체 조건이 다르니 수프를 병 같은 용기에 넣어 내놔야 한다는 데 생각이 아예 미치지 못한다.


친구 여우의 생일에 초대받아서 온 두루미의 입장에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음식을 먹을 재간이 없지 않은가. 이건 애초에 여우가 자신을 골탕 먹일 작정으로 부른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두루미의 지능이나 판단력 역시 여우보다 별반 나을 게 없고 보면, 친구 여우의 생각이 두루미는 수프를 먹으려면 접시가 아니라 병 속에 넣어줘야 한다는 데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데까지 깊이 추론하지 못한다.


꼭 집어 누구 탓이기보다는 여우와 두루미 모두 생각이 짧은 탓에 의도하지 않은 불행한 결과가 나타나고 말았다. “절교한다! 앞으로 난 네가 있는 곳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눌 거야. 같은 숲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게 천추의 한이다, 이놈아!” 만일 두루미가 조금만 더 성질이 급했다면, 이런 선언이 튀어나왔을지 모른다. 여우나 두루미 어느 쪽도 처음에는 아무런 나쁜 의도가 없었는데, 결과는 참담하게 되고 말았다. 한 숲에서 고락을 나누면서 살아온 친구 사이가 어느 날 원수지간으로 바뀔 위기에 처했다.


이런 불상사가 누구 잘못 때문인가. 우선, 두루미의 생리적 특성과 식사 방법에 대해 여우가 무지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다소 지나치다. 여우에게 두루미의 식사법을 왜 미리 파악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라는 것은, 마치 덧셈 뺄셈을 간신히 할 줄 아는 아이한테 구구단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를 내놓고 못 푼다고 질책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잘못은 여우와 두루미가 식사하면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않은 데 있다. 두루미가 접시에 놓인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을 봤을 때 여우가 먼저 두루미에게 물었어야 했다. “얘, 두루미야, 넌 왜 음식을 못 먹니?”라고. 여우가 먼저 묻건 말건 두루미 역시 여우에게 말했어야 한다. 


“여우야, 난 접시에 놓인 음식은 못 먹어. 그러니까 병 같은 것에 넣어줘.”라고. 만일 이런 얘기가 오갔다면, 그 자리에서 접시에 든 국물을 병 같은 데로 옮겨 줌으로써 식사가 즐겁게 끝났을 것이다. 물론 그 다음의 심각한 오해나 위기도 뒤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여우가 답례 초대를 받아 두루미를 찾아갔을 때도, 여우로서는 두루미가 매우 화가 나 있고 앙갚음을 하려고 자기를 초대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만일 여우가 그런 눈치를 챘으면, 두루미의 초대에 룰루랄라 하면서 응했겠는가.


요즘 여기저기서 소통의 중요성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일상사에서 벌어지는 개인 간의 사소한 충돌이나 가족 간의 불화는 물론이고 크고 작은 다양한 집단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까지, 심지어 대통령과 국민 간의 시각차까지 소통이 원활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고 온통 아우성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중심적, 이기적 성향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꽤 영민하다고 자부하지만 어떠한 사태나 상황을 항상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냉철하지도 못하다. 의도하든 않든 간에 오해도 많이 하고 곡해도 자주 한다. 상이한 의견이나 믿음, 관점을 지닌 사람에 대한 관용성 역시 매우 부족하다. 인간의 이런 취약점에 생각이 미치면, ‘소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말고 세상 문제들을 해결할 특효약은 달리 없어 보인다. 


갈등을 해소하거나 긴장을 완화시키는 일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그 정도가 심하거나 입장 차이가 큰 때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경우든지 충분한 소통 없이 합의나 통합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단언할 수 있다. 실제 사이가 좋지 않은 강대국의 최고 통치자들 간에도 핫라인(hot-line)이 상설돼 있다는 것, 전시에도 교전국과 협상의 채널을 항상 확보해둔다는 사실은 소통의 필요성을 충분히 상기시킨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관점, 정치적 견해, 믿음, 문화가 저마다 존재 가치와 정당성을 주장하는 다원적 사회에 살고 있다. 참된 선진 사회, 바람직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과 다양한 여러 조직, 집단이 상식적 바탕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대국적으로는 공존, 상생, 발전하는 그런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삶에 평온이나 안정이 깃들 수 없다. 불통이 완강히 지배할 때 한 사회가 무슨 수로 상호 신뢰와 관용을 토대로 구축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참으로 지금은 우리 모두 소통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진정한 소통을 위해 꾸준히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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