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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청산민주연대 심포지엄 2021. 3.18. 

‘1980년 서울의 봄’ 

 

 

1980년 ‘서울의 봄’의 좌절과 

 정치군벌 하나회의 정권찬탈  --김재홍  

 

 

1. 1980년 서울의 봄 전후 정국상황

 

10.26 박정희 살해사건으로 기대됐던 유신독재 체제의 종식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거꾸로 더 강고한 정치군인들에 의해 12.12 군사반란과 극악한 국민 탄압으로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살상진압이라는 일련의 내란까지 겪어야 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민주회복의 기대 속에 수 개월간 피어오르는 듯 했지만 결국 정치군벌 내란집단에 의해 짓밟혀 꽃 피우지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불행한 복고반동이었다. 그 역사적 반동의 주범집단은 일찍이 박정희가 키워 온 정치군벌 하나회였다. 12.12 군사반란은 한국군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상관 총격상해로 하나회가 군권탈취를 위해 자행한 냉혹한 패륜행위였다. 단발성 하극상 사건을 넘어서는 집단적 군사반란이었다. 


10.26 이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회복 정국에서 실질적 권력은 12.12 군권 탈취로 물리적 힘을 장악한 하나회 집단에 있었다. 그 하나회의 지배권력 아래서 민주회복 정국의 행위주체들이 움직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과 신현확 국무총리 내각이 형식적 행정부로 존재했다. 국회와 김영삼 총재의 신민당과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 등 정당들이 있었고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로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이 공동의장인 국민연합이 활동했다. 최규하 과도정부는 10.26 이후 유화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것이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구속 수감된 학생, 종교인, 재야 민주인사들을 석방했다.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했다. 또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논의를 금지했던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유화책은 1979년 11월10일 ‘시국에 대한 특별담화’로 처음 나왔다. 


“헌법에 규정된 시일 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 …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국민의 광범한 여론을 취합하여 헌법을 조속한 시일내에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통령 선거란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유신헌법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선거를 뜻한다. 개헌의 시한에 대해 그는 1년 이내에 하겠다고 추후에 제시했다.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과 신민당 등은 이에 반대했다. 유신체제 1인 독재의 장본인인 박정희가 제거된 마당에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인정할 수 없었으며 민주헌법으로의 개헌을 최소한 6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모두가 12.12 군사반란 이후 실질 권력을 장악한 하나회 집단의 정권찬탈 음모에 의해 무력화되고 만다. 서울의 봄도 정치군벌 하나회 집단의 내란과정 속에 찻잔 속의 바람 격으로 운명지워져 있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수경사령관 노태우, 그리고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보스인 하나회가 질서확립과 시국안정을 내세우며 국가권력을 장악해 갔다. 특히 전두환은 1980년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 보안사령관직과 함께 겸직했다. 이는 겸직 금지가 명시적으로 규정된 중앙정보부법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였다. 


전두환의 중정부장 서리 겸직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그가 대통령 주재의 주요각료 간담회에 정규 참석자가 됐으며 공식적으로 내각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중앙정보부장은 중요한 정국 사안에 대한 관계기관대책회의나 주요각료 간담회에서 중심적 지위였다. 


서울의 봄이 좌절하고 박정희 유신독재 청산이 저지 당하는 역사 반동과 퇴행의 배경에는 박정희가 키워 놓은 정치군벌 하나회가 실질적 주범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하나회 보스 전두환은 5.18 광주민주항쟁을 살상진압하는 내란을 거쳐 5공정권을 세우고 ‘박정희 없는 박정희유신독재’를 연출했다. 

 

2. 박정희의 친위대 정치군벌 ‘하나회’

 --군부 지하사조직의 배태와 친위세력화 

 

한국 정치군인의 원조 격으로 이승만 정권 시절 반공을 무기로 활개친 특무대장 김창룡을 들 수 있다. 또 이승만의 친위군 노릇으로 유사한 행태를 보인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도 꼽힌다. 그러나 이들은 대통령 이승만의 권위 아래서 그 하수인 역할을 했을 뿐 궁극적으로 정권 장악이나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야심을 내세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군인의 원조로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정치사에서 명실공히 정치군인의 원조는 이미 1952년 6.25 전쟁 중 전시 수도 부산에서 군사쿠데타를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중장에게 건의했던 박정희 소장이었다. 박정희는 국가 존망이 위태로운 지경에도 여야 정치인들이 싸움질을 벌이고 있다며 군부가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 군인으로 유명한 이종찬 장군은 당시 군의 정치개입을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면서 박정희를 크게 나무랐다. 


이종찬 장군은 이승만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이른바 발췌개헌에 야당이 반대하자 군대 동원을 지시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군복을 벗었다. 군의 정치적 동원을 거부하고 직업군인의 표상으로 남은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의 선배인 이종찬 장군을 존경했으나 그의 직업군인관을 배우지 못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 쿠데타를 입에 달고 다녔다. 박정희는 결국 4.19 혁명이 진행된지 1년여만인 1961년 5월 역시 정치인들의 정쟁으로 인한 혼란을 이유로 군사쿠데타를 감행한다. 정치군인의 원조로서 한국 정치사에 오랜 흉터로 남은 군사권위주의 정권을 창업한 것이다. 


정치군인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자 그와 동향인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 출신 장교들이 쿠데타 지지활동을 벌였다. 정규 육사 11기인 전두환 노태우 대위 등은 모교인 육사 교장 강영훈 중장과 교수부 장교들이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하자 육사를 방문해 후배 생도들에게 쿠데타에 대한 지지시위를 종용했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이들 동향 출신 장교들을 군정 기구의 요직에 기용,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노태우는 방첩대 내사과장, 그리고 손영길을 비서실 전속부관으로 배치한다. 당시 5.16 쿠데타의 주모그룹은 육사8기가 핵심으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길재호, 오치성, 옥만호 등과 그 다음 그룹은 육사5기의 김재춘 등이었다. 


쿠데타의 수장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정작 주체세력이 대부분 비영남 출신인 점을 눈여겨 본 영남 출신 장교들은 박정희에 대한 친위대 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거기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공화당 창당에 소요되는 정치자금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른바 4대의혹 사건이 터지자 이들에게 비밀회동의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공화당 창당의 주역 노릇을 하던 김종필은 이른바 자의반 타의반의 해외여행으로 국내 정치권에서 떠나야 했다. 그 후에도 김종필은 지속적으로 대구경북 세력의 견제에 시달리는 악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에 대한 지지활동을 벌인 장교들은 육사 재학 중에 5성회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후에 정치군벌 하나회의 사실상 뿌리에 해당하는 모임이었다. 


전두환은 용성(勇星), 노태우는 관성(冠星), 김복동은 여성(黎星), 최성택은 혜성(慧星), 박병하는 웅성(雄星)으로 일종의 아호처럼 사용했다. 이중 박병하가 함께 졸업하지 못했고 육사 11기의 다른 영남 출신인 정호용, 손영길, 권익현을 회원으로 추가하여 확대개편하고 명칭도 7성회로 바꾸었다. 이들은 쿠데타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경호실에 의해 선발돼 민원비서실이나 중앙정보부 등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을 스카우트한 사람이 그때부터 박정희의 경호실장인 박종규 소령이었으며 박종규는 지속적으로 하나회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의 분신이라 일컬어지는 박종규가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하나회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친위장교 집단으로 자리잡았다. 


1962년 가을 어느날, 서울 효창공원 뒤 청파동의 전두환 대위 거처에서 주로 수도권에 근무하는 육사11기 출신 대위 25명이 모였다. 4대의혹 사건 등 이른바 군사혁명의 명분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회동이었다. 이때 전두환은 장인 이규동 씨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모임을 7성회 회원들이 주도했다. 1963년 2월, 전두환 소령의 거처에서 다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시국문제를 논의하고 군사혁명에서 일정 역할을 확보하기 위해 서클을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군내 사조직 결성을 금지한 육군 인사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쿠데타 권력기구에 가담한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7성회에다 박갑룡(대구. 수경사 30경비단장 역임)과 남중수(청송. 연대장, 에너지관리공단 이사 역임)가 추가됐고 영남 일색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 출신을 한 명 끼워넣어 노정기(전남 장흥. 소장 예편. 필리핀 대사 역임)를 추가해서 모두 10명, 텐 멤버가 확정됐다. 텐 멤버는 서클의 명칭을 놓고 숙의한다. 


“우리는 정규육사 1기다. 나라도 하나, 우리의 우정도 하나로 뭉쳐야 한다. 그런 뜻에서 한마음회가 어떨까?” “그것 괜찮네. 한마음회, 일심회라고 하자.” 이들은 처음에 일심회라고 했다가 한마음회로 1차 바꾸고 최종적으로 ‘하나회’ 명칭을 확정지었다. 


하나회의 조직확대 과정은 철저하게 기성권력에 편승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군내 금지된 지하사조직이었지만 신진세력으로서 새로운 철학이나 군 개혁을 내세웠던 것도 아니었다. 관심은 오직 자신들이 진급과 주요자리를 차지하는 보직인사에 집중됐다. 군 고위장성의 부관이나 권력자의 친인척이 주요 회원 포섭대상에서 우선순위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육사출신 엘리트장교들에게는 하나회의 그런 행태가 천민 군벌주의로 여겨져 기피대상이었다. 실제 하나회의 뼈대를 형성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의 11기부터 박희도 박세직의 12기, 최세창 정동호의 13기, 이종구 안무혁의 14기, 그리고 고명승 이진삼의 15기에 이르기까지 각 기별 대표화랑이나 생도연대장, 수석졸업생 출신 중엔 가담자가 전무했다. 


하나회는 신입 회원이 포섭되면 가입의식을 가졌다. 이따금 비밀요정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전두환의 사저에서 가입선서식을 했다. 선서를 받는 대상은 보스 전두환과 총무, 그리고 가입 추천자였다. 가입서약은 4개항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친다. 하나회의 선후배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회원 상호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이상의 서약에 위반할 시는 ‘인격말살’을 감수한다.” 

 

장교임관식 때 국가에 대해 선서하던 것과 같은 자세로 사조직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다. 이같은 가입의식이나 ‘인격말살을 감수한다’는 배신방지 조항을 보면 하나회는 조폭집단인 마피아조직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응집력 있는 군내 비밀결사로서 이들 하나회가 눈독을 들인 곳이 초기부터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진급과와 보안부대 보안처 내사과였다. 육본 진급과는 장교진급 인사서류를 챙기고 보안부대 내사과는 장교들의 동향보고를 취합한다. 하나회는 이 두 곳을 장악해 군내 진급과 보직을 좌우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부터 20기까지가 1세대, 21기부터 36기까지가 2세대로 구분된다. 각 기별로 9-11명이었으며 이들은 전방 야전군인의 길이 아니라 수도권 주요부대에서 보직관리를 거쳐 고위장성 다수를 배출했다. 보안사령부의 보안처장, 정보처장, 인사처장, 비서실장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청와대 근위부대인 30단과 33단, 그리고 수도권에 위치한 특전사령부 예하 1공수와 3공수와 5공수 여단장이 하나회 핵심들의 필수 코스였다. 


 이렇게 응집력을 가진 정치군벌 하나회가 최고권력자 박정희의 친위대로 키워진 것이다. 하나회 보스 전두환은 소령 시절인 1963년 박정희의 이른바 민정이양 선거 때 박정희로부터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받는다. “민정이양 후 정치권 국회에서 나를 도울 세력이 필요하니 고향에 가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면 어떤가.” 


이에 전두환은 고향에 집안의 기반이나 여러 가지로 어렵다며 고사했다. 박정희는 쿠데타에 가담한 차지철도 출마하는데 못할 게 있나며 거듭 종용했다. 이때 전두환은 먼 앞날을 내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대답했다. “각하, 정치권보다도 군내에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이 바로 전두환이 군내 친위대를 자임한다는 뜻이었다. 이에 박정희도 깨달은 바 있어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며 그를 군내 친위대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10.26 이후 정치권이나 행정부를 차치하고 물리적 힘을 가진 실질 권력집단은 군부였으며 군부의 신경망을 지배하고 있는 기구가 보안사였다. 모든 실병 지휘관에 대한 동향감시를 보안부대원이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 보안사는 사령관 전두환을 비롯해서 중령급 이상 주요 지휘부가 전원 하나회였다. 이들이 12.12 군사반란을 음모하고 실행에 옮겨 군권을 탈취한 이후 서울의 봄을 포함한 민주회복 운동은 사실상 사상누각과 다름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5.16군사쿠데타가 터진 1961년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를 거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993년 이전까지 32년간 한국정치는 군사권위주의 아래 억눌려 있었다. 그 정치체제를 중앙정보부와 정치군벌 하나회가 실질적으로 조형하고 지배했다. 중앙정보부에 대한 얘기가 많이 알려진데 비해 하나회는 아직까지 비화 속에 묻혀있다. 


12.12와 함께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신세대 정치군인들이 등장하자 언론은 막연히 신군부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러나 12.12의 작전계획을 모의하고 실행에 옳긴 장교들의 면면을 뜯어보면 구체적 실체가 드러난다. 모두가 박정희 친위대로 키워진 정치군벌 하나회였다. 

 

3. 하나회의 12.12 군사반란과 민주회복 저지

 

1979년 12월12일, 박정희 살해사건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을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보안사 중심의 합수부가 총격전까지 벌이며 불법 납치했다. 곳곳에서 이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군 수뇌급 고위장성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정치군벌 하나회집단에 의한 12.12 군사반란이었다. 


10.26 사건 한달반여 후인 12월12일 밤, 서울근교 특전사령부 예하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라는 보안사 지령이 떨어졌다. 하나회 회원인 최세창 준장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보안사는 하나회의 할거처였다. 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비롯해 허화평 비서실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수사국장 등 핵심간부들이 모두 하나회였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한때 전두환 노태우 준장을 여단장으로 거느렸던 것을 비롯해 많은 하나회 회원의 상관이었고 하나회 후원자로서 군부 실력자였다. 그가 12.12 군사반란에 동조하기를 거절하자 강제연행 지령이 떨어진 것이다. 자정을 넘겨 1시반 경, 자신의 임무수행이 늦었다는 생각에 최 여단장은 대대장 박종규 중령(후에 사단장, 김영삼 대통령의 12.12 가담자 색출로 보직해임)을 불렀다. 


“하는 수 없다. 우리만 아직 임무를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 신속하게 사령부를 평정해야겠다.” 

3공수 병력이 사령관실 건물을 포위한 채 박 중령이 M16을 겨눈 특공조를 양옆에 거느리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실로 통하는 비서실 문이 잠겨있었다. 특공조가 문고리 주위로 M16을 갈겨 벌집을 만들었다. 


군화발로 문을 차고 들어서자 안쪽에서 권총 탄환이 몇발 날아 왔다. 그러자 특공조 2명이 양쪽 문가에 몸을 붙이고 사령관실 안쪽을 향해 M16을 난사했다. 특공조가 우르르 방안에 뛰어 들었을 때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대위(이날 순직 후 소령 추서)는 유혈이 낭자한 바닥에 쓰러져 있고 정 사령관도 왼팔에 관통상을 입은 채 무저항 상태였다. 김 대위는 병원으로 실려 가다 출혈 과다로 숨졌다. 


보안사의 이같은 상관 체포 지령이 여러 부대의 하니회 실병지휘관들에게 하달됐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한 보안사와 육본 범죄수사단의 대령들, 국방부를 총격 점거한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육본 지휘부가 피신해 간 장태완 수경사령관실을 총격전으로 제압한 헌병단의 지휘관 신 모 중령, 전방에서 서울로 출병한 9사단장 노태우 소장과 29연대장 이필섭 대령과 직전 작전참모 안 모 중령,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그리고 청와대 경비 30단장 장세동 대령과 33단장 김진영 대령… 이들 모두가 하나회였다. 


군사반란에 반대한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을 체포하라는 지령을 전달받은 3군사 참모장 조명기 대령도 하나회다. 그는 사령부 보안반장과 상의한 뒤 차마 직속상관을 체포하지 못했다. 이 사령관은 나중에 노재현 국방장관을 만나러 갔다가 보안사에 체포된다. 


이렇게 육참총장과 그가 활용할 실병부대인 특전사와 수경사를 제압 당함으로써 군 지휘권은 하나회 수중으로 넘어갔다. 군사반란을 음모하고 지령을 내린 지휘부는 하나회가 포진해 있던 보안사였고 그것을 실행한 일선 군부대의 지휘관 역시 모두 하나회였다. 군권을 탈취해 군대의 물리적 힘을 배경으로 실질 권력집단이 된 정치군벌 하나회는 10.26 후 국민의 여망인 헌법 개정을 통한 유신체제 종식과 민주회복을 저지하는 역사에 대한 반동세력이었다. 


하나회는 군에 금지된 비밀결사 사조직이었다. 국가와 국민, 그리고 군의 정규 지휘계통에 복속하지 않고 사조직 보스와 자신들만의 공동이익에 충성했다. 그 결과 그들의 총구는 군 내부를 넘어 결국 국민까지 겨누게 되는 것이다. 정치군벌 하나회가 감행한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확대조치 등 일련의 내란으로 서울의 봄이 상징하던 민주회복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4.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직과 내각 장악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에서 광주민주항쟁 발포진압까지 

 

정치군벌 하나회는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에 포진함으로써 치밀하게 언론검열을 통한 국민여론 공작과 궁극적인 정권찬탈을 위한 조직적인 전략기획 능력을 갖게 된다. 보안사는 중앙정보부에 버금가는 두뇌집단이기도 했다. 이들은 전문적인 여론조작을 위해 언론검열 등의 계획서로 ‘K-공작’이라는 문건을 작성하고 실행했다. 


이 K-공작 계획서의 목적은 전두환의 집권을 정당화하도록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계획서는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해 안정세력을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적시했다. 

이 계획서에 따라 언론공작반은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하여 안정세로 전환”한다는 방침 아래 언론계 중진들과의 개별 접촉과 회유공작 방안을 마련했다. 7대 중앙일간지, 5대 방송사, 2대 통신사의 사장, 주필, 논설위원, 편집 ‧ 보도국장, 정치부장과 사회부장 등 94명을 접촉하도록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이들은 합수부 보도검열단에 지침을 내려 야당, 재야 민주진영, 학생운동권의 조속한 민주회복 개헌이나 계엄령 해제 등의 요구가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삭제하도록 했다. K-공작 계획서는 여야 정치인들 특히 김대중 ‧ 김영삼 씨의 정치활동이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이라고 규정했다. 


1980년 5월13일부터 15일까지 연일 10만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학생시위대가 서울역과 광화문 일대를 휩쓸었을 때 민주회복운동 진영은 일반 국민대중의 호응과 참여가 의외로 부족한 상황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고려대 학생회관에 모여 회의를 가진 서울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 대표 40여명은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로 정치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15일 오후 각 대학 학생회에는 군 병력의 이동을 알리는 시민들의 제보 전화가 빗발쳤다.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 부근에 군인들을 실은 장갑차와 트럭이 집결했다는 제보였다. 


15일 저녁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다시 고려대에 모였다. 서울역에는 7만여 학생시위대가 집결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시민의 호응은 없었다. 노총회관에서 농성 중이던 민주노조 지도부와 조합원들 조차도 학생들의 가두시위 동참 요구를 거절하고 해산해 버렸다. 

이처럼 시민의 무호응과 노조 등 주요 사회단체의 동참 거부는 보안사의 K-공작에 의한 여론조작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국민의 민주회복 의지가 표출되지 않는 상황에서 군부와 대결한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5월15일 학생시위대의 서울역 회군은 그렇게 결정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회의 정권찬탈 음모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에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고 조직적이었다. 이들은 고도로 치밀한 정치공작 수법을 동원해 정국상황이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회복으로 나아가는 분위기를 저지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이들이 대통령 최규하와 국무총리 신현확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해 낸 것이 1980년 4월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직이었다. 이는 겸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을 둔 중앙정보부법 위반이었지만 큰 목적을 위해 작은 시비를 감수했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직은 중앙정보부 조직 자체가 중요한 것 보다도 정부 안에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하는 위상이 더 필요했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주요각료회의와 중요한 시국 사안에 대처하기 위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정규 멤버로서 회의를 주도하는 위상이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나 합수부장이었을 때도 실력자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장관급이 아니기 때문에 주요각료회의에 정규 멤버가 아니라 정국상황 등에 대한 보고자 역할이었다. 


1980년 3월 말경 중장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기 위해 신현확 총리 집무실을 방문한다. 전두환은 신 총리에게 “중앙정보부를 안정시키고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해야겠다”고 요청했다. 

처음에 신현확은 전두환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신현확을 다시 방문하여 “1980년 1월29일 석유값을 59.4% 인상한 배후에서 신 총리가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유언비어가 있어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고 협박했다. 


신현확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결국 대통령 최규하는 전두환을 중정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한 전두환은 정부 내 주요각료급의 일원으로 각종 회의와 간담회에 참석하여 신현확 내각을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정부장 서리 전두환이 내각을 조정 통제하기 시작한 후 5월14일 주요각료 간담회는 전날 연세대 등 일부 학생들이 벌인 가두시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긴급한 회의였다. 그런데 이 간담회에 대학 문제 주무장관인 김옥길 문교부장관은 배제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신 총리는 김옥길 장관을 불러 회의내용을 설명했다. 


학생시위에 대한 강경책으로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시위는 계엄포고령 위반이며 법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학생시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각료회의에 문교부장관이 참석하지 못한 채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가 조정한 회의 결과만을 통보받는 꼴이었다. 김옥길 문교부장관은 통보받은 내용을 기자들에게 전했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이런 방식으로 내각 각료들의 정국 대처회의 등을 무력화시키고 통제 조정했다. 신현확은 1988년 12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내각과 관료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노력한 마지막 시점이 1980년 3월이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고 주요각료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한 4월 중순부터 하나회가 내각을 실질적으로 통제했다는 얘기였다. 


한국 현대사에 운명의 날로 기록된 5월17일, 전두환을 필두로 한 집권음모 세력은 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열었다. 전두환은 이날 보안사의 집권음모 그룹인 비서실장 허화평, 대공처장 이학봉, 정보처장 권정달, 인사처장 허삼수 등 심복들을 동원해 각군 주요지휘관들에게 회의에서 결정할 사항들을 사전에 주지시키도록 치밀하게 준비했다. 


회의에서 결정할 시국대책안은 비상계엄확대 선포가 주요 내용이었다. 주요지휘관 회의는 합참 정보국장 최성택의 상황설명에 이어 자유토론으로 진행됐으며 특전사령관 정호용, 수경사령관 노태우, 20사단장 박준병 등 하나회 핵심들이 강경발언을 쏟아냈다. 유병현 대장 등 일부가 신중론을 제기했만 강경론 대세에 눌리고 말았다. 


4시간여 회의을 마치고 집권음모 세력은 주요지휘관들의 연서명을 받았다. 국방장관 주영복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이렇게 연서명된 군부의 시국대책안을 국무총리 신현확과 대통령 최규하에게 들이밀었다. 최규하는 신현확에게 비상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이날 밤 9시42분 개회한 비상국무회의는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확대 선포안을 찬반토론도 없이 단 8분만에 의결했다. 


그 순간부터 집권음모 집단은 신현확 내각의 권한을 박탈했다. 이어 합수부가 나서 정치권과 재야 주요인사를 체포하고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인 학생운동권을 소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합수부는 비상계엄확대 선포가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된지 불과 10분 후인 밤 10시 정치인과 재야 민주진영 인사들의 집을 급습하여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영희 씨 등을 학생시위의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했다. 동시에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김진만, 이세호 씨 등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등 야당의 주요정치인들은 가택연금 시키고 계엄포고령 10호를 선포해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집권음모 집단의 비상계엄 확대 선포와 주요 정치지도자 체포에 분노한 민중항쟁이 광주에서 불타 올랐다. 학생 시위대에 진압군은 잔혹하게 폭행했고 이를 보고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한 민중항쟁이었다. 전두환을 보스로 한 정치군벌 하나회가 할거해 집권음모를 꾸민 보안사와 이를 실행에 옮긴 공수부대는 전투헬기까지 동원해 발포하는 살상진압을 자행했다.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과를 남긴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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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4-15 18: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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