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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디자인연구소장





윤석열, 우리 정치에서 그의 이름은 상수가 됐다. 그럼에도 윤석열에 대한 이해는 편의적이고, 게으르다.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쉬운 방법은 지금처럼, 편 가르기를 통해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한 쪽은, 정치검찰의 보스로서 법치를 외치지만 사실은 검치를 실현하려는 검찰주의자로 본다. 그래서 윤석열 사단을 이끌고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명분으로 검찰개혁에 저항하는 악당으로 이해한다. 다른 쪽은, 문재인 정부의 폭정에 맞선 의인이자 권력의 비리와 부패를 파헤친 정의로운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유력한 미래권력으로 이해한다.


윤석열 검찰총장 청문회에서 야당은 죽어라고 공격했고, 여당은 기를 쓰고 방어했다. 이 구도가 조국 사태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야당은 구원자로 박수를, 여당은 배신자로 지탄을 보냈다. 이 놀라운 반전은 그의 행보가 정치세력에게 끼친 영향과 유불리가 달라진 탓이다. 이처럼 윤석열은 철저하게 정치에 의해 활용되고 소비됐다.


지금도 그렇다. 과거 무당층·젊은층의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이 정치 밖의 새 인물에 대한 환호로 나타났던 안철수 ‘현상’과 다른 점이다. 윤석열 ‘바람’은 기성 정치와 야당 지지자들이 깊은 원한에도 불구하고 진영논리에 따라 그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윤석열은 기성 정치의 무능이 불러낸 존재로 보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검찰을 호위무사로 활용했고, 권력을 좇는 세력은 고소·고발로 검찰에 의지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가 아니라 걸핏하면 헌재에 제소하고 검찰에 고발하는 대치로 인해 검찰의 권한이 커졌다. 이런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의 정치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근래에 보듯이 이런 정치화는 검찰을 넘어 법원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정치가 무능해서 검찰에 결정을 맡기고, 그럼으로써 더 무능해지는 자해의 악순환에 의해 비대해지고 간이 커진 검찰, 특히 특수부의 일부 검사들이 ‘우리가 나라 구한다’는 착각을 하게 됐고, 이의 응축된 존재가 바로 윤석열이다. 윤석열이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게 된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무능이 초래한 결과라 하겠다.


어느 방법으로 이해하든, 이제 윤석열의 대선 도전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의 검찰정치가 부득불 그의 사퇴로 이어졌듯이 대선 도전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어쩌면 지금에 와서 안 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생뚱맞다. 그런데 하더라도 ‘반문(反文)’이라는 옹색한 명분에 매몰되지 않으면 좋겠다. 


자신의 정치 입문과 대권 도전이, 자신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운 검찰의 정치적 중립·독립을 심대하게 해치는 것이란 점도 인정해야 한다. 또 왜 정치하는지, 왜 대선에 나서겠다는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대통령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 그리고 권력형 비리 사건이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반문은 울림 없는 자극에 그치고 만다. 큰 흐름을 이룰 동력이 되긴 어렵다.


누군가에 대한 반대나 미움을 근거로 정치하면 비극으로 끝난다. 잘해야 소극이다.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했는데, 국민은 보호의 객체가 아니라 심판의 주체다. 어쭙잖은 호민 프레임을 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설명해야 한다. 정치가 아무리 같잖고 우스워 보여도 아무나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준비와 거대한 수렴의 과정을 거친, 여기에 창의적인 구상을 더한 해답 꾸러미를 내놓아야 한다.


 “정치행위의 궁극적 귀결이 애초 의도 내지 목표와 전혀 동떨어지거나 심지어 정반대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 아니 오히려 그런 일이 일반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막스 베버의 뼈 때리는 통찰이다. 


영웅 윤석열의 탄생이 윤석열 때리기의 정반대 결과물이듯, 윤석열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하거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회창이 좋은 예다. 여권도 윤석열을 쉬운 상대라느니, 소영웅주의자로 폄훼하면서 자족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그의 부상에 여권이 져야 할 책임을 인정하면 좋겠다. 


자신들이 발탁했고, 힘을 몰아줬다. 어느 순간 돌변해 그를 공격하고 쫓아내려 하면서 그의 체급을 올려줬고, 반문의 상징·구심으로 만들어줬다. 또 의석수로 밀어붙여 그나 검찰이 정치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줬다. 자업자득, 누굴 탓하랴! 이제는 ‘반 윤’을 버리고 한 눈 팔지 말고 집요하게 민생의 길로 가야 한다. (한겨레 2021. 03.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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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3-16 17: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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