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날 중국 노(魯)나라에 맹손(孟孫)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사냥을 하다 사슴 한 마리를 사로잡자, 진서파(秦西巴)라는 사람에게 그 사슴을 가지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진서파는, 잡힌 사슴의 어미가 뒤따라오며 계속 울부짖자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잡은 사슴을 풀어주고 말았다.


맹손이 돌아와서 사슴을 찾자 진서파가 대답했다. “어미 사슴이 뒤따라 오며 슬피 울기에 차마 볼 수 없어서 잡은 사슴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맹손은 불같이 화를 내며 진서파를 쫓아냈다. 


그로부터 석 달쯤 지난 다음 맹손은 진서파를 다시 불러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다. 의아하게 여긴 맹손의 신하가 물었다. “지난번에는 그를 내쫓으시더니 이제는 불러들여 아드님의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맹손이 대답했다. “진서파는 사슴의 괴로움을 차마 보지 못하고 놓아 주었으니, 혹시 내 아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지 않겠소?”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즘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서 이른바 ‘갑질’ 행태가 심심찮게 논란이 되고 있다. ‘잘 나가는 지위’에 있거나 ‘떵떵거리는 기관이나 기업’의 장(長)이나 자녀,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예를 누리는 사람이나 그 가족’이 저지르는 작태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이다.


온갖 정보와 소문이 빠르게 유통되는 세상이다 보니 근거 없는 이야기도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로 보도되는 얘기들은 대부분 사실로 밝혀진다. 어떤 행태는 왕이 신적인 권세를 지녔던 시대에 노예한테나 할 법한 짓거리와 다름없다. 법률적 용어를 동원하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남용)한 월권행위’들이다.


이런 행태가 법적 정당성을 지닐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대부분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모습들이다. 아니, 그런 행태에 대해 ‘도덕’ 어쩌고 하는 높은(!) 기준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어쨌거나 화제의 장본인들은 대부분 ‘머리는 잘 돌아가는 사람’, ‘지능 지수는 높은 사람’ ‘능력은 뛰어난 사람’들이다. 


결국 문제는 이들이 탁월한 지능이나 특정 분야의 비범한 능력에 비해 형편없는 공감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논란의 초점이 된 인물들 중 상당수가 공감 능력을 원천적으로 결여하고 있어 보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정, 욕구, 자존심 등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남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을 들으면 보람을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며 무시, 따돌림을 당하면 불쾌감, 소외감을 느낀다. ‘성숙한 인격을 지녔다’든가 ‘탁월한 공감능력을 지녔다’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다. 모든 인간이 앞에서 말한 그런 감성과 욕구, 자존심에 대한 반응을 공통되게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어서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인구가 엄청나게 많고 사회 여러 집단의 규모와 구조 역시 대단히 복잡, 비대해졌다. 결과적으로 개개인은 무력하고 초라한 존재로 투영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이란 표현을 슬쩍 바꾼다면 현대인은 ‘무력한(무력감을 느끼는) 개인’이다.


▲한비자(韓非子, BC 약 280∼233년)


개인이 거대한 구조 속의 미세한 한 파편처럼 간주되는 현대사회에서는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개인을 마치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장치의 작은 나사못처럼 간주하기 쉽다. 인간을 한낱 수단으로만 여기게 되는 분위기가 쉽사리 조성된다. 여기에다 우리 자본주의 사회는, 좀 거칠게 단순화하면, 오로지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전력 질주하는 사회다. 까딱하면 개개인을 한낱 돈벌이 수단으로만 바라보기 쉽다는 말이다.


공감능력이란 타인을 나와 똑같은 욕구, 바람, 정서를 지닌 존재임을 늘 명심하면서  바라보고 대우할 줄 아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그 누구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간주하는 태도다. 굳이 철학자 칸트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목적 그 자체인 존재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기계의 작은 부품이나 무슨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 결국 공감능력은 인간다움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단언할 수 있다. 공감능력을 결여하거나 망각하고 행동할 때 사람은 겉모습만 인간이고 실제는 야수(野獸)인 존재로 전락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에서도 공감능력을 키우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설령 다양한 지식을 전수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에 걸맞은 섬세한 공감능력을 배양하지 못한다면 사람다운 사람으로 길러내는 데 실패한 것이 된다. 리더십 역시 공감능력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리더십, 탁월한 지도자는 섬세한 공감능력을 구비한 사람과 동의어로 봐도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공감능력에 대해서도 늘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의 공감능력에 대해 반성함은 사실상 ‘나는 얼마나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살고 있나?’ 자문해 보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므로.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1-03-02 13:05:56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유니세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