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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14 >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 기사등록 2021-01-11 16:42:39
  • 기사수정 2021-01-11 17: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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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 3~1962. 5. 31. 사진)은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독일과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던 유대인들을 체포, 강제 이주, 학살하는 모든 일을 계획하고 지휘했다. 독일이 항복하자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가명을 쓰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공장 기계공으로 은신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60년 이스라엘의 비밀정보부 모사드에 의해 체포당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961년 말에 예루살렘 법정에서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을 추궁당한 끝에 사형 판결을 받아 1962년 5월 교수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아이히만이 누구인지 몰랐다면 모를까 그의 이런 이력을 듣고 나면 섬뜩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진다. 흔한 말로 머리에 뿔이 나거나 악마의 얼굴을 한 흉측한 괴물을 떠올리게 된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600만이나 되는 인간을 체계적으로(!) 끔찍하게 죽이는 일을 총지휘한 사람은 그 모습도 보통 사람들과 같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도 아니고 냉혹한 악당도 아니었다. 전혀 유별나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정 이념이나 신념에 투철한, 일종의 광신자도 아니었다. 그는 재판에서 심문을 받자 자신은 단지 군인으로서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군인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게 의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명령이나 지시는 오직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명령이나 지시가 합당한지, 그걸 수행하면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보는 것은 명령을 따라야 할 자로서는 전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다.


▲1942년의 아돌프 아이히만 


인류에 대해 극악한 범죄를 주도적으로 계획, 실행하고도 아무런 책임의식이나 후회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천연스럽게 말하는 아이히만의 이런 모습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0~1975. 12)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으로 표현했다. 극악도 그 외양만은 지극히 흔해빠지고 평범해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의 악함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아이히만은 머리가 나쁘거나 지능지수가 떨어지지 않았다. 군대 고급장교(당시 중령)로서의 책임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었고 자기가 감당, 수행해야 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진급하기 위해 상관을 죽이거나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을 건전한(?) 사람이라고 아렌트는 단언했다. 

 

아렌트에 의하면, 아이히만이 근본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생각함’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경우에도 ‘명령’이니까 당연히 수행해야 한다고 여겼을 뿐이라는 말이다.  


아렌트의 이런 결론, 즉 ‘생각하지 않음’이 끔직한 악의 근원일 수 있다는 주장은 조금 의아해 보이기도 한다. 철학자나 사상가들처럼 체계적으로, 심오하게 혹은 창의적으로까지는 몰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생각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의 대상을 ‘이해(理解)’하려고 노력하도록 이끈다.


 ‘이해한다’라는 단어를 본래적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해 보면 ‘합리적으로(이치에 합당하게) 해결한다’는 뜻이 된다. 영어 단어 ‘understand’는 ‘아래’를 뜻하는 ‘under’와 ‘서다’를 뜻하는 ‘stand’의 합성어다. ‘이해한다’함은 나를 남이 처한 형편이나 입장에 세워놓는 일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말로든 영어로든, 결국 생각함을 통해 우리는 상호 이해의 길로 들어서게 됨을 알 수 있다.   


한편, 타자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공감(empathy)의 길로 향하게 한다. 남의 입장,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할 때, 상대방이 결국 나와 비슷한 감성과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남의 슬픔이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해나 공감 없이 유대감을 느끼면서 공존한다는 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모순된 말이다. 이런 이해와 공감은 결국 인간 각자가 ‘스스로 생각함’을 실천할 때만 생겨난다. ‘생각하지 않음’이나 ‘생각 없음’은 비인간성이나 냉혹함과 쉽사리 연결된다.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조직사회의 일원으로서 혹은 이와 비슷하게 삶을 영위한다. 스스로는 실정법적 명령은 물론이고 각종 지시나 지침, 상식적 규범, 오랜 관행 등에 따르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처럼 따르기를 요구, 기대하면서 살아간다.

엄청난 공적 해악이나 비리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생각하지 않음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극악무도한 일도 의도적인 경우보다 오히려 ‘아무런 생각 없이’ 맹종하는 태도로 초래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악이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띤다는 사실은 스스로 생각함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최근 상당한 지위의 공직자들이 중요한 국가정책의 판단, 결정과 관련된 자료를 작성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면서 ‘데이터 마사지’를 하거나 윗사람에게 ‘알아서 기는’ 행태가 있었음이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하나같이 막중한 직위나 직책에 걸맞지 않은 자세, 즉 ‘생각하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한다. 이성적이라 함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성찰적 능력, 옳고 그름을 저울질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생각함을 팽개쳐버리면 우리는 사람의 외양을 한 짐승으로 전락한다. 생각하지 않음 또는 생각 없는 삶은 큰 죄악의 결과를 향해 돌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항상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제대로 생각함은, 사적으론 불건전한 삶으로 공적으론 역사의 퇴행으로 향하는 결정적 순간에,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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