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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상담심리 전문가

前MBC통일방송협력단장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콩’과 ‘팥’ 두 글자에 유난히 강세가 주어짐을 알 수 있다. 입 모양도 전혀 다르며, 구강에서 소리 나는 위치도 상하로 전혀 다른 곳임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속담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서로 많이 다르다’는 뉘앙스가 입 모양과 소리에 의해 한층 더 잘 표현되고 있다. 


 영어로는 ‘콩’이 ‘soybean’이고 ‘팥’은 ‘redbean’이어서 ‘bean’이라는 스펠링 때문에 우리글 보다는 오히려 두 작물이 ‘닮은 꼴’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soy’와 ‘red’의 발음은 ‘콩’과 ‘팥’처럼 입 모양이 많이 다른 점은 또 우리말 발음과 비슷하다. 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역시 콩이나 팥이나 ‘쌍 떡잎 식물 장미목 콩과의 한 해 살이 풀’로 똑같이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라틴어로 명명되는 콩(Glycine max)과 팥(Vigna angularis)의 학명은 또 전혀 다르다. 필자는 같은 bean으로 부르는 영어의 뉘앙스보다는 소리와 쓰인 자음과 모음, 그리고 입모양조차 전혀 다른 ‘콩’과 ‘팥’이 더 지혜로운 표현인 것 같다. 영어는 ‘비슷함’을 우선했고, 우리말은 ‘다름’을 우선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여기는지는 이 글을 쓰는 동안 간간이 언급하게 될 것이다.  어떻든 이 속담은 농경민족이 오랫동안 콩도 심고 팥도 심어 열매를 수확해 본 체험 속에서 터득한 자연현상의 ‘항상성’ 즉 “대물림”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배어있는 말이다. 

 

 두 작물의 생명력 안에는, 백 번 천 번 심어 봐도 콩은 콩이요 팥은 팥으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변함없는 대물림”이 견지되고 있다. 그러한 대물림이 없다면, 결코 콩은 콩일 수 없고, 팥 또한 팥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콩은 콩대로 팥은 팥대로 각각 다른 개체 생명체와는 분명 차별화 되는 “독특하고 유일한 대물림 현상“이 두 작물의 정체성으로 내재되어 있고, 항상성으로 외현되어지고 있음을 글자와 말로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개체 생명체들의 이런 “대물림 현상”을 우리는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그 첫 번 째로, 이런 “대물림 현상”이 개체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가장 기반이 되는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있다고 이해한다. 집에서 개를 길렀는데,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면, 우리는 무척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밭에 배추를 심었는데 고추가 열렸다면 다음 절기에 고추를 얻기 위해 배추를 또 심어야할지 그래도 고추를 심어야 할지 무척 헷갈릴 것이다. 결국은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뜰 것인가 안뜰 것인가 의심하며 불안해할 것이다. 즉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예측하는 내일, 모레, 글피, 곧 미래의 삼라만상에는 “대물림 현상”의 “항상성”이 필수 불가결의 조건인 것이다. 

 

 두 번째 의미로는, 그런 항상성, 즉 “대물림”은 ‘생존의 안정감’과 동시에 비록 유한하지만 “생명의 지속성”이라는 “희망”도 동반하고 있다. 여기서 쉽게 떠오르는 러시아의 국민시인 알렉산드로 푸시킨의 시(詩)가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이 시에서 ‘마음은 미래에 산다' 라는 구절은 “희망”이란 정서가 “대물림”에 내재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또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는 격언은 “살아가기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스스로 죽지 말고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봐야 한다.”라는 어떤 ‘당위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삶의 고통을 회피하기만 하려는 태도는 긍정적인 ‘희망의 불씨’를 찾지 못해서이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수용력과 견디는 인내력은 그 안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자동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나무와 나무를 비벼 불을 지필 때, 비벼대는 ‘힘듦’과 ‘참음’이 있어야 연기가 피어오르는 이치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의미까지 부여한다면, 자연계의 개체 생명체에게 각자 유일하고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대물림”과 특히 우리 인간에게 여일하게 이어지는 “정서적 대물림(안정감과 희망)”은 세상만물이(인간포함) 이러한 신비한 섭리 안에서만 생존되는 “유한 생명체”임을 절감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간다면, 그런 절감에는 “무한자”에게 “감읍(感泣)”하는 정서도 침잠(沈潛)되어 있다. 


그러한 “감읍”은 우리들 삶의 태도에 ”겸손이라는 정서“를 섞어준다.”겸손의 씨앗“ 또한 우리들 인간의 “몸과 마음속(영혼)”에 대물림되고 있기 때문에 찾아서 음미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감읍의 대상”은 “나”라는 생명체 자체에서부터 “무한 생명체”인 “하느님(神)”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느님(神)”은 모든 개체생명체 안에 편재되어 “대물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정서의 대물림”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적 태도 변화”에 따라 완만히, 또는 각종 “사회적 혁명”에 의해 급격하게 달라지기도 해 왔다. 작금의 “한국인의 정서적 변화”는 결국 “K-pop의 위력”이 되어 “세계인의 정서적 태도 변화”에 견인차 역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정서적 태도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결코 변화되지 않으려는 인종∙민족∙부족∙씨족(가문)∙계층의 “고착된 사회 정서적 대물림”은 결국 그 집단의 “몰락”을 초래할 뿐이다. 귀족∙양반, 주인∙노예 계층의 벽이 무너졌고, 아직도 세상 곳곳에 남은 “구시대적, 정서적 벽(태도)”도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강도’는 무너지기를 바라는 “민초”들의 “정서적 파워”에 달려있다. 


 “콩이나 팥을 심고, 심은 우리들이 잘 돌보지 않으면, 튼실한 콩과 팥을 수확할 수 없지 않겠는가!” 필자는 그동안 아내를 “여보~!”라고 불러보려고 여러 번 마음먹었지만, 아직도 “어이~!”하고 불러진다. 하지만, 조만간 그렇게 부르려는 “희망과 욕구”가 있음을 자작하고 있다.


 “정서적 대물림”은 변화되기가 좀처럼 어렵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영적 힘”에 의해 시대적 환경에 ‘바람직하게 변화’할 수 있는 “강력한 적응력” 또한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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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2-07 16: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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