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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12> "우리 것은 좋은 것"과 "우리 것만 좋은 것"의 차이?
  • 기사등록 2020-11-27 15:49:49
  • 기사수정 2020-11-27 15: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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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리스 중부의 포키스 지방에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이 있다. BC 6세기 무렵 처음으로 세워졌다는데,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다. 이 신전의 지하에는 옴파로스(omphalos)라는, 절구통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돌이 모셔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 옴파로스는 델포이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데, 그 의미는 ‘대지의 배꼽’ 또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알려져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가 지구 전체의 배꼽, 전 세계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말이다.

 

동양 문명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중국은 주위 동서남북의 다른 나라들을 각각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그 뜻을 풀이하면 ‘동쪽 오랑캐’, ‘서쪽 오랑캐’, ‘남쪽 야만족’, ‘북쪽 오랑캐’ 쯤 된다. 참고로 덧붙이면 이 ‘동쪽 오랑캐’는 바로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 스스로에 관해서는 중화(中華)로 자처했다. 세계의 중심, 중앙이라는 의미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오랑캐나 야만족이고, 오로지 그들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이요 문화국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전 지구가 사실상 한 마을처럼 좁혀지고 있고 온갖 문화와 문명이 역동적으로 교류, 변화하는 오늘, 두 나라의 이런 믿음은 참으로 가소로워 보인다. 일시적으로 영향력이 크다든가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다든가, 유행을 끌어간다든가 하는 거라면 몰라도 도대체 어디가 세계 중심이란 말인가. 게다가 주변의 다른 민족이나 나라들은 다 야만족이고 자기들만이 문화 민족이라는 주장에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땠는가. 좀 점잔을 빼야 하는 자리에서가 아니면 지금도 가끔 쓰는 표현이 있다. 서양 사람들을 통칭할 때 쓰는 ‘양놈’이다. 중국 사람들은 ‘되놈’이라고 부르고, 일본 사람들은 ‘왜놈’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듯이 ‘동방예의지국‘으로 자처했다. 


여기서 ‘놈’이란 호칭이 사람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경멸과 멸시에 가득 찼을 때 나오는 말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내 민족 내 나라가 이 세계의 중심이라거나 문화적으로 가장 우월하다고,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는 문화라고 불러주기에도 한심한 수준이라고 여기는 이런 사고방식을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라고 부른다.

 

이런 사고방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 폐해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좋은 예가 바로 1940년대 전후에 독일을 중심으로 벌어진 유태인 대학살이 아니겠는가. 내 민족 내 나라의 문화나 전통, 가치 기준만이 완벽하고 훌륭한 것이고,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것은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 기껏해야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집단적 독선이 비인간적이고 광적인 인간 말살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온 세계에 널리 알리기도 한다. 당연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 대한 이런 긍지가 다른 문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다른 문화는 살펴볼 필요조차 없다는 극단적 폐쇄성으로까지 치달으면 안 된다.

 

다른 민족이나 다른 나라의 문화도 다 제 나름의 깊은 연원과 심오한 의미,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규모 작은 가문 정도의 집단도 한 두 마디로 재단하기 어려운 가풍이나 문화를 지닌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의 잣대, 혹은 내 기준을 일방적으로 들이대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한 동안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그렇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이 표현을 빌어서 말하면 “남의(다른) 것도 (그 나름대로) 좋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든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가 “우리 것만 좋은 것이다”라는 독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순전히 실용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질적인 문화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문화를 온전히,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 문화의 지평을 넓히고 성숙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 간에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거나 모든 문화가 등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거의 전 인류적 보편 타당성을 지닌 문화가 있는가 하면, 악습이나 폐기해야 할 관행이라고 규정해도 될 만큼 문제 투성이인 문화도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자기의 기준만을 고집하여 다른 문화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이질적인 문화에 대해 백안시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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