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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전 시선-9> 언론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 기사등록 2020-09-25 14:42:04
  • 기사수정 2020-10-03 16: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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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전체주의자였고 소련 공산주의자들과의 흥정조차 옹호한 회색 분자였다' 누가 말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과연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케네디가 1961년 1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라.”고 오만방자하게 요구한 데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국민 개개인보다 국가가 더 우선한다는 주장이니 도저히 민주주의자라고 볼 수 없고, 개인은 국가와의 관련성 속에서나 그 가치를 지닌다는 위험한 전체주의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그는 “협상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는데, 이는 그 당시가 냉전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소련의 스탈린주의자들과도 얼마든지 군사적, 외교적 흥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그는 공산주의자들과도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는 뻔뻔스러운 회색분자였음이 분명해진다.

 


런 견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케네디의 연설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은 이런 해석에 아연실색할 것이다. 그의 연설 내용에 동의하건 안 하건, 위와 같은 해석은 터무니없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기발하고(?) 악의적인 해석은 연설문의 원문을 거의 ‘착실히’(!) 인용하고 있다. 케네디의 연설문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의 의미를 그것이 쓰인 문맥을 떠나서 논할 때 얼마나 엉뚱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의 발언을 두고 그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로 논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문제시되는 발언을 ‘했다’고 확인되면 발언과 관련된 진실이 다 밝혀졌다고 판단하고 발언의 배경이나 상황, 문맥 등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결국 발언은 당초의 진의와 상당히 동떨어지게 해석되거나 심하게 왜곡되고 만다. 발언자는 발언의 의도나 배경을 해명하려고 애써 보지만 대다수가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그런 노력은 대체로 별 효과가 없다. 심한 경우 그런 해명을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뒤늦게 쓸데없는 변명을 늘어 놓는다는 핀잔이나 듣는다. 

 

어떤 발언이나 주장을 요약하거나 단순화 할 경우에는 항상 오해,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 점에서는 심오한 철학적 사상이든 소박한 정치적 견해든 예외가 없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요약하고 아무리 신중하게 명명(규정짓기)하더라도 오해나 왜곡의 위험은 상존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어떤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거칠게 요약하고 악의가 교묘히 배합된 ‘딱지 붙이기’를 할 때 왜곡의 정도가 얼마나 증폭되겠는가. (물론 왜곡 자체가 초래하는 결과를 당초의 목표로 삼은 측으로서는 그처럼 거친 단순화는 큰 성공을 거둔 셈이 된다). 

 

거친 단순화나 성급하게 규정짓기는 비지성적임을 넘어 반지성적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 상식 수준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횡포다. 지성적, 상식적이라 함은 사실과 진실을 지향한다는 말이 아닌가!

 

허수아비를 두들겨 패는 일은 아주 쉽다. 허수아비는 아무리 두들겨 패도 전혀 반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 공격하고자 하는 상대편을 마치 허수아비 처럼 공격하기 좋게 왜곡시켜 놓고 신나게 비판, 공격하는 잘못에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fallacy of straw-man)’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악의가 내포된 거친 단순화가 낳는 오류, 마땅히 전력을 다해 퇴치해야 할 오류다.

 

어느 대학 총장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사립대학 등록금은 비쌀 수밖에 없다.”고 한 발언을 “가난한 학생이 대학교육을 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욕심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하면서 공격하는 경우를 보자. 앞의 실제 발언과 뒤의 해석 문장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런데 왜곡된 뒤의 해석만을 접한 사람은 발언자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누가 보더라도 뒤의 주장은 도저히 정당화하거나 방어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제시한다. 어느 지식인이 “조선의 패망에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큰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조선 자체의 여러 내적 요인도 상당히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조선이 패망한 것은 오로지 조선의 잘못이고 일본은 잘못이나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라고 몰아붙이고 그를 ‘친일분자’로 규정하여 사정없이 비난한 경우다.

 

건전한 사회, 원활한 의견교환과 진지한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는, 말 그대로 ‘열린 사회’는 사실과 진실을 추구하려는 열정과 노력에 비례하여 이뤄진다. 학교교육이나 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기관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은 사회나 국가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선도해야 한다.

 

요즘 보면 책이나 글의 제목에까지 ‘닥치고 ××’라는 표현이 버젓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초래되는 오해나 왜곡의 위험성까지 잘 알만한 엘리트들이, 그래서 그런 오해, 왜곡의 발생을 마땅히 저지, 경고해야 할 사람들이, 거칠게 단순화하고 악의적 ‘딱지 붙이기’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실정이다. 


일개 소시민이 눈에도 이런 인사들의 지적 수준과 행태는 참으로 한심해 보이고 나라의 장래 또한 크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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