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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북방에 살어리랏다- 제6화> 쿠데타 실패로 소련 죽고 북한 살다
  • 기사등록 2020-09-21 15:40:44
  • 기사수정 2020-09-21 16: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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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 공사

前 서강대 겸임교수

現 국회사무처 (사)유라시아21 부이사장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 박사




1991년 8월 19일이었다. 평상시처럼 아침에 일어나 TV를 켰다. KGB 의장을 비롯한 핵심 각료들이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기자회견중이었다. 소련의 정치관행상 이례적이었다. 


비상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국가비상사태위원회(ГКЧП) 위원이라고 소개했다. 무언가 허술한 모양새였다. 심지어 술을 마신 것 같기도 했다. 이들이 바로 식물상태의 소련을 안락사시킨 8월 쿠데타(путч) 주모자 8인이었다. 


국가보안위원회(KBG) 의장 크류치코프, 부통령 야나예프, 안보회의 제1서기 바클라노프, 내각수상 파블로프, 국방장관 야조프, 내무장관 푸고, 농민연합회 의장 스타로두브체프, 기업연합회 의장 티쟈코프 등이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몰아내는데 앞장선 보수파 각료들이다. 


<‘애국자-우리가 진짜다!’ 란 프랑카드를 배경으로 기자회견하는 쿠데타 주모자 8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 바짐 교수에게 급히 전화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제2의 볼쉐비키혁명이냐?’ 다그치듯 물었다. 바짐 교수는 ‘맞다. 비상시국이다. 두고봐야 알 것 같다. 다만, 주모자들이 술 취한 상태이고, 한 사람은 손을 떨면서 불안해 한다’고 답변했다.


‘오늘 아침에 옐친의 최측근 소브챠크 시장이 급히 모스크바로 갔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인근 핀란드로 피신할 준비를 하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불안하고 답답해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시내 중심부인 혁명광장으로 나갔다.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쿠데타가 발발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TV 채널을 돌리자 모스크바 붉은 광장과 의사당 앞에 탱크가 진주해 있었다. 모스크바 대사관에 전화했다. 별다른 지침을 주지않았다. 그냥 기다려 보자는 정도였다. 오후에 모스크바 시민들이 의사당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모자인 야나예프 부통령이 오후 4시경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옐친은 의사당에서 대책회의를 마치고 탱크위에 올라가 군중을 향해 쿠데타반대 연설을 했다. 국영 TV방송은 이 모습을 저녁 뉴스에서 가감없이 보도했고 전세계로 퍼졌다. 


다음 날인 8월 2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혁명광장에서 쿠데타 반대 군중시위가 최초로 있었다. 옐친이 전날 모스크바 대책회의에서 혁명의 메카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인테리겐차들이 먼저 나서 줄 것을 소브챠크 시장에게 당부했다는 후문이다.


<의사당 앞 탱크 위에 올라 쿠데타 반대 연설을 하는 옐친 전 대통령>


쿠데타군과 시민들이 팽팽히 맞섰다. 쿠데타군은 8월 20일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야간통행 금지령을 내리고 국회의사당 공격을 준비했다. 이는 크렘린에 대한 공격도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크렘린 수비대들도 방어태세를 갖췄다. 8월 21일 장갑차들이 크렘린 인근 시위대가 쳐놓은 장애물을 돌진함으로써 시위대 3명이 죽었다. 군중들은 탱크에 불을 지르면서 저항했다. 쿠데타군 내부에서 유혈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더 이상 강행할 수 없었다. 30만 여 명을 체포하기 위한 수갑도 미리 준비해 두고, 모스크바 근교의 교도소 감방도 비워 두었다.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 고르바초프와 타협하는 길 밖에 없었다. 


교섭 대표단을 크림반도로 급파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만나는 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모든 결정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8월 22일 이른 아침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서  초췌한 모습으로 전용기 트랩에서 내려왔다. 쿠데타가 실패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8.22 전용기에서 내려오는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권좌에서도 내려올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출처:이타르타스>



쿠데타 진압후 모든 주도권은 옐친에게로 넘어갔다. 8월 22일 러시아의 공식 국기가 ‘낫과 망치’에서 ‘삼색기’로 교체됐다. 8월 24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물러났다. 12월 8일 러시아공화국의 옐친, 우크라이나 크라추크, 벨라루스 슈시케비치가 민스크에 모여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했다.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22년 12월 30일 출범했던 소비에트연방은 70여년만인 1991년 12월 26일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지구의 반을 호령했던 슈퍼 파워 소련은 긴 동면에 들어갔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개혁파 체포를 위해 자신들이 준비한 수갑을 차고 자신들이 비워 둔 교도소 감방에 수감됐다. 실패할 것을 미리 알았을까?


소련해체 직후인 1992년 4월 25일 북한에서도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 인민군 창설 60주년 행사에서 러시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파 군 간부들이 김일성과 김정일을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김 부자가 위치한 주석단을 사열식에 참여한 전차포로 날려버리는 계획이었다. 이들은 소련에서 유학하면서 북한 체제의 허구성을 개탄했던 개화파들이다. 


종주국에서 몇 개월 전에 있었던 보수파들의 몰락에 고무되었다. 사열식에 동원된 전차는 프룬제 유학파인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수도방위사령부 탱크사단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박기서 국장이 무력부 행사에 수방사의 탱크동원을 반대하면서 쿠데타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피 비린 내 나는 숙청작업이 시작됐다. 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8호동 비밀회의장에서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파인 장령급 지휘관 70여명이 체포됐다. 그후 5년간 소련 유학파 200여명이 총살됐다. 


쿠데타 모의를 사전에 적발하고 숙청한 공로를 인정받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인민군 보위사령부로 승격됐고, 보위국장이던 원흥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돼 대장으로 승격했다.


결론적으로, 소련과 북한에서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릴레이 쿠데타 기도가 있었다. 먼저 소련에서 발발한 것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보수파 쿠데타였다. 곧이어 북한에서는 김부자 세습을 반대하는 유학출신 개혁파 장교들의 모의가 뒤따랐다. 모두 실패한 정변으로 종결됐고 그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소련해체라는 세기적 변화와 함께 북한에서는 피의 숙청이 뒤따랐다. 이로인해 북러관계가 더욱 악화됐지만, 김정일은 오히려 군부를 장악하는 계기로 역(逆)이용했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다. 쿠데타 실패로 소련은 죽었지만 북한은 살았다. 그리고 북한정권은 3대세습을 이어가며 건재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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