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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북방에 살어리랏다 제5화> 러시아 인에게는 3명의 어머니가 있다
  • 기사등록 2020-09-07 11:40:42
  • 기사수정 2020-09-07 12: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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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 공사 

前 서강대 겸임교수 

現 국회사무처 (사)유라시아21 부이사장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 박사




   러시아에 미인이 많다는 건 공개된 비밀이다. 러시아어 음성학을 가르쳤던 에카테리나 교수는 런던대학내에서 미녀로 소문났다. 강의시간에 넋을 잃고 쳐다 볼 만큼 미인이었다.


러시아 여성들은 에카테리아 교수처럼 모두 미인일까? 1990년 8월 설레이는 마음으로 러시아땅을 밟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대로는 ‘물 반 미녀 반’으로 북적거렸다. 앞을 봐도 미인이요 뒤를 봐도 미인들이었다. 


겨울에는 털모자 속에 감춰진 백옥 같은 얼굴이 러시아의 상징인 자작나무의 하얀 나신(裸身)과도 같았다. 여름에는 네바강 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 하는 여성들은 외국인들의 또다른 눈요기 대상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미인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내 눈높이가 올라가서일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사유화와 함께 부상한 신흥 갑부들이 갖추어야 할 몇가지 필수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가 저택같은 별장(다차)을 짓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다차의 크기가 엄격하게 제한됐지만, 건축규제가 풀리면서 억눌렸던 욕망이 한꺼번에 분출했다. 두번째는 벤츠를 사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제상황에서 최고의 벤츠 매출고를 자랑하는 곳이 모스크바였다. 


그리고 세 번째가 미인을 아내(또는 애인)로 삼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로 고급 별장과 벤치안에 칩거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공재(?)가 자본주의로 바뀌면서 독과점 양상을 보인 것이다. 러시아 여성들은 개혁개방의 물결을 따라 너나없이 해외로 나갔다. 전세계의 패션계를 주름잡았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동일 수준의 패션모델을 구하려면 최소 5-6배 고비용을 치러야 했다. 한소수교 직후 한국을 찾는 러시아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 언론들은 ‘러시아 여성=밤무대’라는 등식을 만들어 독자들의 천박한 흥미를 유발시키곤 했다. 심지어 러시아 남성들 조차도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마지막 남은 수출용 원자재’라고 비아냥 거렸다.


러시아에서 남존여비 사상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제정 러시아 때 귀족 여성들은 ‘테렘’이라는 규수방에 갇혀서 살아야 했다. 여성 차별과 가부장적 전통은 몽골지배의 악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기에 여성해방도 사회이슈로 부상했다.


고르키의 ‘어머니’ 주인공 닐로바는 가혹한 착취로 인해 지옥같은 운명에 끌려 다녔던 수많은 여성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고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아 구부러진 몸으로 비실비실 게 걸음을 치곤했다. 그런 어머니가 청년 노동자들과 함께 혁명사상을 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어도 전통적인 어머니상은 변하지 않았다.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기능과 아이를 양육하는 성적 역할은 여성들의 정치적 상승목표를 방해했다. 소련 시절 공산주의 신여성은 모성과 같은 여성 고유의 특성을 지니면서 정치적 의식과 사회적 능동성을 가지고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을 의미했다.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였다. 서구 여성들처럼 남성과 동등한 관계에서 혼인(married with)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색시들 처럼 ‘남편을 따라 출가한다’((выйть за муж)는 언어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여성은 항상 성스러운 존재로 인식됐다. 


러시아인에게는 3명의 어머니가 있다. 육친의 어머니, 조국의 어머니, 신의 어머니 바로 그것이다. ‘육친의 어머니’는 가정과 자녀와 남편에게 철저하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다름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묘지 47만명 영혼을 얼싸안고 있는 ‘조국 어머니 상’>



 ‘조국의 어머니’는 2차 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900일 봉쇄로 도시 인구의 3분의 1을 잃어가면서도 사수한 조국 땅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묘지 정중앙에 47만명의 죽은 영혼을 얼싸안고 있는 ‘조국 어머니 상’이 있다. ‘신의 어머니’는 혹독한 추위와 빈번한 외침에서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성상화(聖像畵)가 성모 마리아 상이다. 러시아 대중음악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한인 3세 아니타 최 대뷰곡 ‘마마’를 열창했다. 처절한 삶의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동양적 효성심이 폐부(肺腑)로부터 공명했다.



“아침 해가 별무리를 감출 때
아이는 아쉬워 손짓하며 마마 별을 잡았지만
마마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
무심한 햇살은 아이를 뿌리치고 마마 별을 삼켜버렸네.


마마는 들리나요? 꿈속의 메아리가.
마마! 어디에 어디에 있어요. 마마 없는 세상에 홀로 남았어요.
마마! 나의 마마! 내겐 마마가 필요해요. 사랑하는 마마...“



러시아 남성들에게는 술자리에서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다. 세 번째 건배는 반드시 여성을 위한 것이다. 그 자리에 여성이 단 1명만 있어도, 어린 유치원생이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여성들이 외투를 벗고 입을 때 남성은 반드시 뒤에서 받아 걸어주고 입혀준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배려인가, 아니면 참회의 발로인가? 현지에 사는 한국 부인들은 이 좋은 전통과 문화를 한국 남성들도 따라 배우라고 구박(?)했다.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출범한 북한에서는 어떨까? 남남북녀! 그래 북방으로 갈수록 미녀가 많은 것은 동일하다. 최근 탈북 여성들의 증언을 보면, 남성들의 여성 폭력이 만만치않다고 한다. 한국에 오면 모두 미투로 고발당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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