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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북방에 살어리랏다-제4화> 한국-소련 수교에 밀린 북한-소련 관계
  • 기사등록 2020-08-28 14:51:15
  • 기사수정 2020-09-07 11: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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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 공사

前 서강대 겸임교수

現 국회사무처 (사)유라시아21 부이사장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 박사




  1시간 동안 다이얼을 돌렸다. 그 당시 소련에는 버튼식 전화기가 없었다. 계속 통화중이었다. 손가락이 저려왔다. 철의 장막을 실감케 하는 국제전화 서비스다. 포기하기에는 투자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드디어 교환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박하지만 반가웠다. 


곧이어 아내의 목소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우리집 둘째 아이의 출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소수교를 사흘 앞 둔 날, 1990년 9월 26일 딸 로명이 세상에 태어났다. 태아의 목이 탯줄에 감겨 산모와 아기의 생명이 위태로웠다. 급히 분만실로 옮겨 수술했다. 난산의 고통 그 이상이었다.


한소수교도 딸아이의 출생만큼 진통을 겪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견고했다. 도처에 장애물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저항은 결사적이었다. 소련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김정일은 “고르바초프는 미국놈들에게 팔리고 있다. 자기 혼자만 팔리는 것이 아니라 소련공산당을 팔아 넘기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세바르드나제 외상이 한소수교 사실을 통고해야 하는 무거운 임무를 안고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과의 면담을 수차 요청했지만 여지없이 거절당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뿐만아니라 쿠릴 열도의 일본 반환을 지지하겠다고 협박했다. 세바르드나제도 북한측의 태도에 격분해 예정보다 3개월 앞당겨 수교협정에 서명해 버렸다.


이념적으로 소련은 북한에게 정신적 고국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선진화된 생산시설은 모두 소련이 제공했다. 북한의 최첨단 무기들도 원천적으로 소련이 지원했다. 한국과 미국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이라는 보호국이 절대 필요했다. 소련이 한국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1990년 9월 3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최호중 외무장관과 세바르드나제 외상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한소수교가 공식으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1884년 7월 7일 조로(朝露)통상조약 체결후 106년만이다. 그 당시에도 주변 열강들의 견제가 만만치않았다.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방’ 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에서도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미 러시아는 1854년 4월 군함 팔라다호를 타고 여수 거문도에 와서 수교를 제의했다. 지방관헌은 처벌이 두려워 러시아 황제의 친서를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1990. 12.13 노태우-고르바초프 두 정상이 크레믈린 궁에서 

                                        모스크바선언에 서명하고 있다.(사진=대통령기록관)



한러관계는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기를 거쳐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재개됐다.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정은 하바롭스크 88여단의 대대장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정권을 만들었다. 남한지역에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은 정치학 박사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곧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고 미국은 최초로 남한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12월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북쪽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김일성이 내각수상으로 선출됐다.


 이어서 10월 12일 소련과 수교했다. 결과적으로 한소수교는 북소수교 보다 42년 늦게 이뤄진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후세인들의 가정을 놓고 항상 아쉬움을 남긴다. 남한과 북한의 초대 지도자는 모두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남한의 이승만은 정치학자로서 외교투쟁을, 북한의 김일성은 군인으로서 무력투쟁을 택했을 뿐이다. 지리적으로 남방인은 농경문화의 토대위에 온건적·수세적이고, 북방인은 기마민족의 속성에 따라 진취적·공세적 성향을 가졌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북한 지도자가 군인 출신이 아니라 학자 출신이었다면 한국전쟁이 일어났을까? 단언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빨치산 대장 김일성이 집요하게 스탈린을 설득해서 도발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깊은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대통령 전용기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에 착륙했다. 눈발이 날리면서 태극기가 유난히 빛났다. 감격스러웠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2월 13일부터 16일간 일정으로 소련을 공식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소련을 방문한 인물로 기록됐다.

                       1991.4.19 제주도 제3차 한소 정상회담에서 건배 장면(사진=연합뉴스)



1년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각각 이틀씩 방문했다. 모스크바에서는 크렘린 정상회담후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그 당시에는 레닌그라드)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를 4명이나 배출한 요페물리화학연구소와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쥐 미술관을 방문했다.


필자는 정부 유학생으로서 노대통령의 방문행사를 지원해야 했다. 선발대가 도착한 1개월전부터 눈코 뜰새없이 분주했다. 정부 출장팀은 노어 통역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몇 명 안되는 유학생들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유학생들은 서투른 노어실력으로 상전 대접을 받았다.


군사정권하에서 청와대 직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었다. 특히 경호원들은 안하무인격이었다. ‘권력은 보스와의 물리적 거리에 비례한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1년전 노태우 대통령의 영국 방문 때도 행사준비에 차출됐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한달간 지원업무에 매달렸다. 그때와는 달리 청와대 경호원들의 고압적인 태도는 온데간데 없었다. 전적으로 언어때문이었다.


영빈관의 오찬장에서 헤프닝이 일어났다. 대통령 수라상에 올라갈 커피를 누가 마셔버렸다. 주방에서 야단법석이었다. 이미 검식이 끝났는데, 다시 준비해야 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주방을 출입하는 사람은 현지인들을 제외하면 노어를 구사하는 지원요원 뿐이었다. 필자는 아니었다.

                                                    한소수교 기념 주화


그렇다면 같이 활동했던 정부 유학생 김갑돌(가명)이었다. 평상시 같았다면 청와대 경호원이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지나갔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소련의 88올림픽 참가, 한소수교, 모스크바 정상회담으로 진화되면서 가시적 성과를 쌓아갔다. 


그리고 2년 뒤 중국과도 수교했다. 북방외교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그때도 필자는 본부에서 한중수교 및 노태우 대통령 방중 업무에 지원을 나갔다. 북방과의 인연은 이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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