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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 곳에서는 천연의 자연 생태계가 꿈틀거린다. 숲에 다가간 사람은 나무를 베어내고 보금자리를 일군다. 문화를 가꾸는 것이다. 문화를 일구기 위해 사람이 나무를 베어내기만 하는 건 아니다. 더 많은 나무를 새로 심는 것도 사람의 문화다.


그러나 사람이 숲을 일구는 건 거개의 경우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베어내기 위해, 다시 말해 사람이 쓰기 위해서다. 자연과 문화는 하릴없이 서로를 배반한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뉴욕주립대학 환경생물학과 교수인 로빈 월 키머러는 최근 펴낸 '향모를 땋으며'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것과 먹고살기 위해 그 생명을 취하는 것 사이의 불가피한 긴장을 해소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조건"이라고 지적했다.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가기 위해 자연과 문화의 균형을 맞추는 게 우리 삶, 즉 문화의 조건이라는 얘기다.


키머러 교수에 따르면 우리의 대표 소나무 숲인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은 자연과 문화의 긴장 관계를 지혜롭게 해소한 결과가 된다.


조선 시대에는 나무를 심고 철저히 보호ㆍ관리했다. 궁궐을 짓기 위해서였다. 황장목으로 더 많이 불리던 금강소나무를 궁궐 건축과 왕실 관곽재(棺槨材)로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건축 재료가 마땅치 않던 시절에 나무만큼 알맞춤한 것은 없었다. 


금강소나무를 건축 재료로 확보하기 위해 조선 세종 23년(1441)에 '송목금벌지법(松木禁伐之法)'이 제정되기도 했다. 숙종 때는 봉산(封山·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한 산) 282곳을 지정해 적극 관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은 그렇게 지켜졌다. 뚜렷한 증거인 '황장봉계표석(黃腸封界標石)'이 소광리 소광천과 대광천 계곡의 장군터 가까이에 남아 있다. 


경북문화재자료 제300호인 이 표석에는 "황장목의 봉계 지역을 생달현(生達峴), 안일왕산(安一王山), 대리(大里), 당성(堂城) 네 지역으로 하고 이 지역을 명길(命吉)이라는 산지기로 하여금 관리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은 분명 국가가 철저하게 보호한 인공 숲이다.


사실 소나무 숲이 오래 번성하는 건 생태계의 순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람의 개입이 없는 자연 상태라면 소나무 등 침엽수는 빠르게 자라는 넓은 잎의 활엽수에 자리를 빼앗기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숲의 경우 신갈나무나 서어나무 종류가 숲을 최종적으로 차지하는 게 자연스러운 천이 과정이다.


자연 상태였다면 소나무 숲은 결코 남을 수 없었다. 조선의 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자연의 순리는 배반한 것이다.


오늘날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관리되는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에서 금강소나무 160만여그루가 살아간다. 예전과 달리 대량 벌목 사태가 주춤해지면서 금강소나무 외에 다양한 식생이 어울려 안정적인 숲으로 진화했다. 


사람이 지킨 숲이지만 자연 생태에 가장 가깝게 남은 숲이다. 사람에 의한 문화적 성취가 마침내 자연에 가깝게 이뤄진 숲, 달리 말하면 '문화적 결과로서의 자연'이다.


곧게 뻗어오른 금강소나무 줄기


울진 소광리 인공숲
160만여그루 금강소나무 군락
국가가 철저하게 보호
생태계 순리에 역행했지만
자연생태에 가장 가깝게 남은
'문화적 성취'


오늘날에는 사람의 개입이 전혀 없는 완벽한 자연 상태의 숲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좁다란 면적에 많은 인구가 밀집한 한반도에서는 더 그렇다. 식물원·수목원 같은 인공 숲을 곳곳에서 앞다퉈 조성하는 요즘 우리가 가꿔야 할 숲의 의미에 대해 짚어보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정원을 '제2의 자연'이라고 칭한 생태주의 작가 마이클 폴란은 자연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 '세컨드 네이처'에서 "자연과 문화를 상반된 것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타성적 인식"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천연의 숲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할 만큼 이미 지구 전체에 사람이 퍼졌다. 따라서 천연의 자연 상태를 재현한다는 것은 헛된 꿈에 불과하다. 결국 폴란은 "자연과 문화 사이의 균형을 도모"하는 일이 정원을 가꾸는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정원이란 "그 공간의 각별함을 깨우쳐주고, 에너지·기술·식량 따위와 관련한 관심을 가까운 곳에서 찾게" 하는 창조와 발견의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폴란의 주장대로라면 수목원·식물원이 사람의 즐거움만을 위한 형태(문화)를 지향하게 돼서는 안 된다. 관람자를 배려하지 않고 온전히 원시림(자연)만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원시림만 추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문화와 자연의 절묘한 조화가 이 시대 식물원의 지향점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을 돌아보게 되는 건 그런 맥락에서다.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충남 태안반도의 천리포수목원은 국제수목학회가 2000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현재 무려 1만7000종의 식물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하나의 수목원에서 수집한 식물 종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작지 않은 규모다. 그야말로 나무의 천국이다.


천리포 지역에 나무를 심은 건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960년대부터다. 당시 이 지역은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모래 동산이었다. 그때 마침 일본어 통역장교로 2차대전에 참전한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나중에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영구 귀화)가 전쟁이 마무리된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숲을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나무가 주인 되는 세상'을 이루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300년 뒤까지 내다보며 나무를 심었다. 그는 천연의 숲을 재현하기 위해 생육 조건이 좋지 않은 황무지에 철저하면서도 강력하게 개입했다. 화학 비료·농약을 쓰지 않고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 게 그가 자연에 개입하는 절대 원칙이었다. 

자연에 가장 가까워지기 위한 '선한' 원칙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된 문화적 결과물이다.


사람의 선한 개입과 함께 세월도 겹겹이 쌓이면서 천리포 바닷가 숲에는 짙은 초록빛이 내려앉았다.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우리라 내다본 식물학자들은 천리포의 초록빛 변화에 화들짝 놀랐다. 천리포 동산은 식물 생태 연구의 보고가 됐다. '서해안의 푸른 보석'이라는 천리포수목원의 별칭은 그렇게 지어졌다.


천리포수목원의 목련이 개화한 봄 풍경


화학비료·가지치기 없이 한 원칙 지킨
'나무가 주인인 동산' 태안 천리포수목원


1970년대에 '천리포수목원'이라는 이름으로 숲을 등록한 뒤 지금까지 천리포수목원은 식물을 자연스럽게 키우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다. 설립자 민병갈은 2002년 작고했다. 


이후 천리포수목원은 이전의 비공개 원칙을 내려놓고 2009년부터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천리포수목원 운영자들이 여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지향점은 '나무가 주인인 동산'이다.


천리포수목원은 언제 찾아도 편안한 숲이다. 우리 토종 식물은 물론이고 이 땅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타국 땅의 식물까지 모두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서 자라온 것처럼 의젓하게 살아가는, 천연에 가장 가까운 숲이다.


인공 숲이 이토록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낯설다. 사람의 힘으로 일군 인공 숲이건만 그 어떤 숲보다 자연미를 또렷하게 구현하려는 사람의 선한 개입이 선명하게 살아 있는 생태 숲이다. 이는 천리포수목원만의 미덕이다. 머뭇거리지 않고 폴란이 말하는 "자연과 문화의 중간지대에서 균형을 이룬 자리"라는 결론에 닿게 된다.


인공미와 자연미, 문화와 자연의 경계를 놀랍도록 신비롭게 드러내는 천리포수목원의 숲. 여기서 삶의 진정성에 대해 짚어보는 것이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창조적 지혜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비 온 뒤 솟아나는 대나무처럼 급속히 늘어가는 식물원들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규준으로 삼기에 충분하리라. 세상이 열리고 그 안에 나무가 있었다. 사람은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사람은 문화를 이루기 위해 다시 나무를 심고 온갖 정성으로 키웠다. 


자연도 문화도 결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문화와 자연의 중립지대로 살아남은 동해 울진, 서해 태안반도의 아름다운 숲이야말로 기후변화 시대에 우리의 건강한 호흡을 위해 끝끝내 지켜내야 할 초록빛 희망이다. (아시아경제 20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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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8-19 17: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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