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7> 극단적 사고를 경계하자
  • 기사등록 2020-08-14 17:17:43
  • 기사수정 2020-08-14 17:18:18
기사수정

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좌우익 대립이 심각할 때의 이야기다. 한 시골 노인이 먼 친척 집을 찾아 산길을 가고 있었다. 호젓한 산길을 가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갑자기 그에게 총을 겨누고 물었다. “여보시오, 노인 양반! 당신은 좌익이요 우익이요?”


노인은 우선 그들이 무얼 묻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골에 묻혀 살던 그로서는 좌익, 우익이라는 단어가 전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은 살던 마을에서는 제법 존경받고 있었고, 스스로도 꽤 유식하다고 자부하던 터라 차마 질문 내용을 모르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분위기 자체가 도저히 무얼 물어볼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험악하기도 했다. ‘익’은 모르지만 ‘왼 좌’와 ‘오른 우’는 충분히 짐작됐고, 아마도 ‘왼손 잡이인지 오른손 잡이인지를 묻는 것이려니 여기고 대답했다. “나는 우익이요!”


그러자 총을 겨누었던 사람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그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늙은이가 순 반동이구만! 이런 반동분자는 살려두면 안 돼!”라는 욕설과 함께. 까딱하면 산속에서 맞아 죽게 된 노인은 제발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자신은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일 뿐이지 절대로 우익이 아니라고 수없이 되풀이 했다.

간신히 죽을 위기에서 빠져나온 이 노인이 계속 산길을 갔다. 한참을 가다가 다시 일군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 역시 총을 들이대면서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 어른, 당신 좌익이요, 아니면 우익이요?”바로 얼마 전에 고초를 겪은 터라 노인은 이번에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좌익이라오.”


질문했던 사람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그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늙은이가 순 빨갱이잖아! 이런 빨갱이는 살려두면 위험해!”라고 외치는 소리가 나왔다. 노인은 참으로 황당했다. 그러나 깊은 산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는 생각에 잘못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자신은 실제로는 우익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간곡한 호소가 통했는지 노인은 간신히 풀려나서 계속 산길을 갈 수 있었다. 노인으로서는 도대체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도 두들겨 맞기만 하니, 황당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시는 그런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해졌다.


다시 한참 산길을 가다가 또다시 노인은 자기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람들과 맞닥뜨렸다. 앞의 경우와 똑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노인은 완전히 혼절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어느 편이라고 해야 여길 무사히 지나갈 나갈 수 있겠소? 나는 아무 것도 모르오!” 참으로 답답한 마음에서 나온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린 이런 인간이 제일 싫어! 한마디로 뻔뻔한 회색분자 아닌가 말이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작자들 말이지!” 비웃음과 함께 노인에게 개머리판 세례가 쏟아졌다.


실화는 아닐 것이다.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시절의 험악한 상황을 빗대어 지어낸 얘기로 보인다. 허구적인 얘기겠지만, 이념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조차 전연 없는 한 순박한 시골 노인이 처한 정황이 한없이 딱하게 여겨질 뿐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실제로 어쩌면 이보다 더 살벌하게 전개됐었는지도 모른다. ‘제주 4•3 사태’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을 떠올려보라. 이 이야기 속의 노인은 차라리 운이 좋은 축에 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동물적 욕정과 인간적 이성의 합작품이다. 욕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많이 추구하게 하는 경향을 지닌 반면,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적게 추구하게 하는 경향을 지녔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두 속성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그 균형적 중간에 해당하는 '중용'(中庸, golden mean)을 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용'(蠻勇)은 욕정에만 따른 행동이고 '비겁'(卑怯)은 이성에만 따른 행동이며, 용기야말로 이 둘 사이의 중용적 행동이라고 예시했다. 


다른 사례로, 사치와 무례는 욕정에만 따른 행동인 반면, 인색함과 아첨은 이성에만 따른 행동이고, 절제와 예의바름이야말로 각각 중용적 행동에 해당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두상 (루브르박물관 소장) 


색채로 말하면, 한 쪽 극단에 검은 색이, 다른 쪽 극단에 흰 색이 있고, 그 양 극단의 중간에는 넓은 회색지대가 있다. 한 개인의 사고방식이든 이념이나 국가 시책이든, 그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게 펼쳐질 수 있다. 문제 해결책에 관해서도 그렇다.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로부터 거대하고 장기적인 국가 정책이나 법률에 이르기까지 어떤 문제에 대한 해법은 그 폭이 다양할 수 있다. 굳이 ‘보수-진보’라는 잣대로 말하면 ‘극단적 보수’의 대답을 한 극단으로 치면 반대쪽에 놓일 ‘극단적 진보’의 대답까지 그 사이에 중도적인 견해가 널리 분포한다. 


여러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에는 “당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시오.”하는 무언의 압력이 대단히 강하다. 어느 한 극단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사상적으로 선명하지 않은 사람,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지성인들의 대화에서조차 극단론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툭하면 편 가르기와 거친 흑백논리가 동원된다. 진지함이 결여된 토론은 극단적 진영논리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경직되고 살벌하기까지 한 분위기다.


현실적 합리적 대안은 양 극단의 어느 한 쪽 견해에 속하기보다는 대체로 중간지대, 회색지대에 존재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개인의 사소하고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로부터 막중한 장기적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중용, 중도(中道)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성찰해보자. 중용은 한 개인의 덕목인 동시에 사회적 덕목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고귀한 덕목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절대로 산술적 중간치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중용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그저 어렴풋한 중간’이나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는 기회주의적 태도’, ‘무사안일의 소시민적 철학’이 아니다. 모든 요소가 종합적으로 고려된, 어떠한 상황이나 문제에 가장 적절한 해답을 일컫는다. ‘적중(的中)’이란 단어가 말해주듯이 문제의 핵심,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주희(1130~1200), 중국 송대 말엽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귀한 덕목인 중용을 파악하고 실천하려면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통찰력은 다양한 경험과 진지하고 깊은 성찰 없이는 길러질 수 없다. 주희(朱熹, 1130~1200) 역시 중용을 실천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설파했다.


 “중용이란 것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며,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평상의 이치를 잘 깨달아 능히 하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다. 이 경지에 도달한 군자는 시의(時宜)에 맞춰 적절히 처신하지만 소인은 중용을 지키지 못해 제멋대로 행동한다.”


중용은 달성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모두가 공들여 추구할 만한 귀한 덕목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경직된 사고방식과 극단적 의견에 뿌리를 둔, 갈등과 대립이 만연해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갈등과 대립이 시간이 흐르면서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점증한다는 데 있다. 이런 난국이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중용의 가치를 되새기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0-08-14 17:17:43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유니세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