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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유성룡 기축옥사> 발행 눈길 끌어 - 기축옥사 주도자, 송강 정철이냐, 서애 유성룡이냐
  • 기사등록 2024-04-09 04:07:31
  • 기사수정 2024-04-09 04: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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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축옥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책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양성현 작가는 <유성룡 기축옥사>에서 ‘송강 정철 중심의 기축옥사’를 따져보고, 유성룡의 행적을 따라 당시 사건을 따져물었다.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22년(1589)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고변으로부터 시작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린 옥사다. 


우리 역사는 그동안 기축옥사를 철저히 ‘송강 정철이 동인 선비 1천 명을 죽인 사건’으로 규정해 알려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기축옥사를 주도한 실세로 ‘정철’이 아닌 ‘유성룡’으로 적시하고 있다. “유성룡 등 주류동인이 임금을 도와 비주류동인과 서인에게 큰 피해를 준 사건”으로 다시 쓴 것이다.

기축옥사 기간 단연 떠오른 인물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승승장구했다. 기축옥사와 그 직후 당상관에서부터 영의정까지 단번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 그였다. 게다가 그는 기축옥사 당시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에 또 대제학까지를 겸해, 권력을 독점했다. 반면 정철은 위관을 맡은 지 한 달 만에 임금의 눈 밖으로 밀려났다. 서인은 탄압받았고 ‘간철(간사한 정철)’로 낙인 찍혔다.

기축옥사 거의 대부분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주도된다. 당시 ‘동인’이라 해서 ‘다 같은 동인’이 아니었다. ‘주류동인’이 있고, ‘비주류동인’이 따로 있었다. ‘남명계동인’과 ‘호남동인’ 등 비주류동인이 큰 피해를 봤다. ‘서인’도 ‘주류동인’에게 탄압받는다. 당시 중앙에 있던 거의 모든 서인들이 주류동인의 공격으로 파직되고, 쫓겨난다. 심지어 정철마저도 건저의(建儲議)사건이라는 함정에 빠뜨려 귀양 보냈던 그들이다.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도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곧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바른 보고를 봉쇄하고, “전쟁은 없다”는 김성일의 나쁜 보고에 힘을 실어준 것도 ‘유성룡’ 등이 벌인 일이었다. 그렇게 대비 없이 맞이한 참혹한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이들 주류동인이 ‘기축옥사 최대 피해자’로 둔갑한다.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아 동인에게 피해를 줬다’는 식의 가짜뉴스를 퍼뜨려 ‘마치 자신들이=피해자’라고 호소하고 있다. 송강 정철에 대한 비난도 마찬가지다. 실상은 기축옥사 때에도 ‘주류동인 정권’이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그 뒤 선조 때에도 여전히 ‘동인정권’이었다. 유성룡은 또 임진왜란을 극복하게 한 ‘명재상’ ‘영웅’으로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이 역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흑’을 ‘백’으로 만들고, ‘백’을 ‘흑’으로 바꾼 것이다.

이 책은 그 왜곡된 오욕의 역사를 바로잡아가고 있다. 저자 양성현은 “명나라가 쇄락할 무렵에 학자 이탁오가 한 말처럼 ‘앞의 개가 짖으면, 생각 없이 무작정 따라 짖던’ 그런 역사가 ‘기축옥사’ 이야기”였다며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줄곧 따라 짖어왔고, 멈추지 않았다. 최근 발간한 《전라도천년사》에서마저 왜곡되게 기술돼온 그 역사, 폐단을 적확하게 바로잡아 바꿔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 이 책을 내놨다!”고 말했다.

저자 양성현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내일신문 기자를 역임하고, 그간 <다시보는 임진왜란>, <사암 박순>, <실사구시>, <흥학관>, <무산 고제환, 세도정치에 맞서다>, <보성 義이야기>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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