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미국 스탠퍼드大 교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라 스피니(Laura Spinney)는 저서 ‘창백한 탑승자’(Pale Rider)에서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이 세계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때라 주목을 덜 받았지만, 인명 피해의 정도나 전후 국제 질서에 미친 영향은 전쟁보다 팬데믹이 훨씬 더 컸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가설은 1919년 초 파리에서 열린 전후 처리 협상에 참여하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스페인 독감에 걸렸는데, 지병이 있던 그의 건강이 악화된 탓에 민족자결의 원칙, 패전국에 대한 관대한 처벌 등을 통해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만들려 했던 그의 노력도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몰랐던 조선의 민족운동가들은 윌슨의 원칙에 고무돼 1919년 초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고, 이는 조선의 입장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한 3·1운동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정작 김규식은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으며, 3·1운동 역시 독립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윌슨 대통령은 그해 가을에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됐고,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제국주의와 보호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혹독한 처벌에 불만을 가졌던 독일에서 파시즘이 등장하면서 더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코로나 이후 보호주의 더 고조

포퓰리즘 아닌 펀더멘털 중요

文정부 대책엔 해묵은 전술뿐


지난 18일 백악관 회의를 주재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선 전략용으로 대중 강경책을 펴고 있다. UPI연합뉴스

100년 만에 찾아온 팬데믹 이후의 세계도 국수주의와 보호주의가 고조되며 탈세계화(deglobalization)가 전개될 모양새다. 당시의 주역이 유럽이었다면 향후 짜일 새 판의 주인공은 미국과 중국이다. 1단계 합의로 무역 갈등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던 상황에서 이 사태가 터졌고, 미 대선 정국과 맞물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향후 미·중 갈등을 재점화하는 뇌관이 되고 있다. 중국발 팬데믹으로 최다 확진자·사망자가 발생한 미국은 중국의 불투명한 초기 대응을 문제 삼으면서 코로나19의 우한시 실험실 유출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재선 가도에 먹구름이 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 강경 발언과 정책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은 미국 음모론으로 맞서며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과 중국의 책임 의식은 찾아볼 수 없고, 세계적 재앙을 이겨내기 위한 국제 공조는커녕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마저 흔들리고 있다. 미·중 디커플링(탈동조화)도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에선 중국에 의존하는 희토류나 의약품 등 주요 품목이 ‘안보화’할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며 이들 제조업에 대한 전략적 육성이나 리쇼어링(생산시설 국내 이전)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인 스콧 아트라스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허버트 맥매스터 후버연구소 연구원은 공동 칼럼에서 미국 의약 복제품(generics)의 주요 수입국이 인도인데, 인도는 이들 원재료의 70%를 중국에서 수입한다면서, 이처럼 중요한 품목을 중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지난 10일 자 기사에서 “코로나19의 대유행은 공급망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부 및 기업들의 오래된 우려를 재부각시켰다”면서 인텔을 필두로 주요 산업 분야의 생산기지를 해외에서 국내로 이전하는 움직임을 심도 있게 보도했다.

팬데믹 이후 나타날 엄청난 변화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본사 엔지니어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 부품 회사들의 셧다운으로 한국의 모기업이 생산을 중지해야 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미·중 디커플링이 본격화되고, 글로벌 공급망에 균열이 생기게 되면 수출 주도 경제하에서 미·중의 가치사슬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주 미국 상무부는 “앞으로 화웨이가 미국 기술로 만들어진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삼성을 비롯한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화웨이에 제품을 공급하려면 미 정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런 추세가 가속화되면 미·중 사이에 낀 한국 기업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이 견지해온 안미경중(安美經中) 패러다임도 통하기 어려울 것이다.

포스트 팬데믹은 일시적 경기 침체가 아닌 쓰나미를 동반한 전쟁이 될 것인데, 정부가 제시한 ‘한국판 뉴딜’이나 ‘선도국가론’은 이에 대한 절절한 고민이나 구체적 해법이 없다. 규제혁신, 고용보험 확대 등 해묵은 전술만 있을 뿐 새로운 국제전에 대비한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100년 전 큰 흐름을 읽지 못하고 치러야 했던 서러움을 반복해선 안 된다. 특정 이념에 맞는 정책만 펴거나 포퓰리즘에 빠져 단기 처방에 머물 여유가 없다. 미래를 바라보며 기초과학, 기술, 교육 등에 과감하고 적극적인 투자로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문화일보 2020.05.20)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0-05-20 17:39:51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유니세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