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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 교수)


광주가 고향인 친구가 있다. 늘 궁금했으나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일을 40년이 지난 올해 말해주었다. “서울도, 부산도, 대구도, 전국의 모든 도시가 5·18 광주가 될 수 있었다”는 말로 그 날의 기억을 조심스레 끄집어내는 친구. “광주는 그 비극의 현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민주의 성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다만 다른 도시가 침묵할 때 바른 목소리를 내었고 무자비한 총탄에 쓰러지는 피붙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전남대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탱크와 착검한 총을 든 군인들의 기억, 날아오는 총알을 막으려 고향에서 가져온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어 여섯 식구가 가슴 졸이던 한밤의 기억. 지나는 길에 장갑차 앞에서 오금이 저려 꼼짝 못한 한낮의 기억. 친구는 “우리 자손들이 겪어서는 안 될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그 아픔을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날 아침의 기억을 말한다”고 했다.

화해와 용서, 치유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한다. 다 좋은 말, 반드시 필요한 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관계 안에서 오해로 응어리진 문제, 잘못 엉킨 매듭은 제때 잘 풀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는 않다.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위계, 조직이나 국가 권력 안에서 개인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어떤 상처의 자리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다. 오작동된 권력과 행정은 때로 법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특히 다수의 안전과 질서를 내세워자행된 폭력과 억압은 오랜 세월 개인의 희생을 드러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한다.

화해와 용서는 많은 경우, 억울한 피해자의 상처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강자의 논리에 쉽게 동원된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과 아픔을 얼버무리며 피해자에게 망각을 쉽게 강요한다. 새로운 출발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말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하려면, 강제된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의 바른 치유를 위해 그 화해와 용서가 꼭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반드시 곪아 터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해와 용서, 치유의 첫 걸음은 무엇일까?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일. 아픔을 아프다고, 슬픔을 슬프다고, 상처를 상처라고 말하는 일. 억눌러왔던 끔찍한 기억의 자리를 바라보고 입 밖으로 내는 일. 이를 잘 들어주는 일. 그게 모든 치유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 자기 유년의 기억에 대해 함구하던 내 친구가 들려준 공포는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 상처의 자리를 짐작하고서도 그동안 감히 묻지 못한 우리의 무심을 배려라도 하듯, 친구는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이라도 이야기한다고 강조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상처를 상처라고 말할 수만 있어도, 의식의 심연 아래 강제로 밀봉해야만 했던 기억을 끄집어 낼 수만 있어도, 그래서 내가, 우리가, 이렇게 아팠노라고 말할 수만 있어도 상처는 아물 수 있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비극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우리가 제때 돌보지 못한, 그래서 아직도 쓰라린 상처의 자리는 너무 많다. 한 시인이 말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라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고. 지금 내 몸의 중심, 우리 사회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 우리의 일은 버려둔 그 아픈 자리, 중심을 되찾는 일이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아시아경제신문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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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5-20 17: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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