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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 교수)


호베르토 아제베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 남기고 사임 의사를 전격 발표하면서 국제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건강이나 정치적 야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WTO 미래를 위해 가족과 함께 내린 결정이라는 입장만을 밝혔다.

사임 정황이 이해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WTO 사무총장 1차 임기를 시작했던 2013년 9월 당시 사실상 협상이 중단됐던 도하개발의제(DDA) 협상 재개와 진전을 취임 일성으로 내걸었지만 지금까지의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회원국 간 입장 조율이 용이한 내용 위주로 무역원활화협정(TFA)을 타결한 것 외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대한 대응도 취약했다. 주요국 회의(G20) 정상회의 합의에 따라 세계은행 등과 세계 보호무역주의 조치 발동 현황 자료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늘어나는 보호무역주의 추세에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미국의 일방주의적 조치에 WTO의 위상은 시간이 갈수록 흔들렸다.

미중 통상 갈등이 고조되면서 미국은 중국의 개도국 지위 조정을 요구했지만 WTO 사무총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미국이 분쟁해결기구(DSB) 상소위원 임명 절차 개시를 반대하면서 지난해 말 WTO 권위는 바닥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대안적인 분쟁해결절차 마련을 고심했지만 WTO 회원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상황에서 성과를 보기 어려웠다.

미국은 개도국 지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WTO 탈퇴를 거론했고, 중국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하며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세계 1,2위 무역대국인 미중은 WTO를 제쳐두고 쌍무적 무역전쟁을 벌였고, WTO는 국제무역의 규율자가 아닌 방관자로 추락했다.

현재 WTO에서 협상 중인 수산분야 보조금과 전자상거래 규범 역시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등 세계 강대국의 입장 차이로 난항을 겪고 있다. 미국은 다자주의 패러다임에서의 협상을 접고 양자적인 방식으로 WTO에서 자국의 입장을 관철하고자 하면서 WTO 처지는 더욱 초라해졌다. 올 초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병하고, 전 세계로 확산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 수준으로 국제무역환경이 악화하면서 WTO 사무총장의 무력감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지난해 개최하기로 했던 제12차 WTO 각료회의까지 무산됐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볼 때 아제베도 사무총장도 더 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국이 퇴임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WTO 수장으로서 무력감에다가 인간적인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세계 무역이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고, 많은 국가가 수출제한 등 보호무역조치를 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WTO 수장마저 공석이라면 세계 무역의 미래는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사무총장 자신도 코로나 이후 세계는 코로나 이전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높은 리더십을 가진 신임 사무총장이 세계 무역의 새 판을 짜는 것이 WTO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후임 사무총장 임명에 최소 6개월이 소요되고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후임 사무총장을 선임하는 것도 현 WTO 사무총장의 중요한 책무다.

후임 사무총장은 작금의 세계경제 위기를 글로벌 차원에서 대응하고 국가 간 입장 차이를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지만, 현재의 미중 대결구도와 WTO 위상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만족할만한 해법을 찾기 어려울 것이고 미국의 WTO 흔들기는 계속될 것이다.

아제베도 사무총장의 사임은 현 WTO 체제 붕괴를 가속화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코로나가 종식돼도 대외통상환경 악화로 상당기간 경제위기 빨간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의 세계적 대유행과 WTO 위기에 미중 갈등까지 고조되고 있다. 최악의 통상환경에 대비해야 할 시기다. (서울경제신문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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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5-19 17: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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