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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대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세종(世宗)이 느닷없이 대한민국 정치에 호출됐다. 최근 국회의원 당선인과 청와대 대변인이 문재인 대통령을 조선의 국왕 태종과 세종에 견주는 발언을 한 것이다. ‘태종과 세종에 비유’를 듣는 순간 문 대통령이 위태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자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태가 벌써 심각하다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대통령이 옹폐(壅蔽·윗사람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되겠구나 하는 우려가 생겼다.

세종이 가장 꺼리는 것이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이는 옹폐 상황이었다. 재위 중반에 어느 관리가 유난히 이삭이 많이 달린 보리를 올리면서 “이것은 성인의 덕화(德化)가 만물을 두루 적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이처럼 아름다움을 과장하는 것을 보니 심히 부끄럽다”면서 그 보리 종자를 잘 심어 좋은 품종으로 개량해 다시 바치라고 지시했다. 자신을 성군으로 추앙하려는 아부성 발언을 차단하는 한편, 오히려 그것을 품질 개량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세종은 아첨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꺼렸다. 아부를 듣는 순간 위험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왕 자신을 칭송한 ‘삼강행실도’ 서문을 읽은 후 “이 말이 지나친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신하가 임금을 기리는 데 실제 모습보다 지나치고 아름다움이 도에 넘치는 경향이 있다”면서 그것을 조심하라고 꾸짖었다. 아부는 듣는 순간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식물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마르기 시작하는 것처럼, 아부는 사람에게 현실에 기초한 정확한 판단을 못 하게 만든다. 마키아벨리가 “아부란 참으로 피하기 어려운 권력의 역병(疫病)”이라면서, 그 처방으로 지혜로운 비판자를 옆에 둘 것을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부라는 역병을 피하기 위해 세종이 취한 조치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자신을 낮추면서 끊임없이 구언(求言)한 것이다. “부족한 내가 왕이 돼서 홍수와 가뭄이 해마다 그치지 않고, 백성들이 여기저기를 떠돌며 근심과 고통 속에 지내는데, 모두 내 책임”이라며 직언을 요청했다. 왕 자신의 허물을 비롯해 시행 중인 정책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어렵고 힘든 상황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당부했다. 임금이 스스로를 낮춘 효과는 컸다. 조정의 관리들이 부처별로 모여 불과 사흘 만에 ‘가히 시행할 만한 조건’을 갖춘 60조목의 아이디어를 냈다.

또 다른 조치는 싱크탱크를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제안된 아이디어를 정밀하게 살피게 했다. 왕에게 들어온 말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제안된 아이디어는 쓸 만한 것인지를 전문가 집단이 검토하게 했다. 인상적인 것은 세종 중반에 시행된 집현전 혁신 방안이다. 집현전 학사들의 사가독서, 즉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연구에 전념하게 한 제도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세종은 젊은 학사들에게 북한산 자락의 진관사에 들어가 더욱 몰입해서 독서하게 했다. 정통한 인재만이 크게 쓰인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정말로 세종에게서 배우고 싶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다. 자신을 낮춰 나라에 도움되는 말을 구언하는 일과, 그렇게 들어온 말을 전문가 집단으로 하여금 검토하고 시행할 조건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집현전 설립 600돌인 올해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지금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정부 출연 연구소부터 혁신하는 일을 시작하면 좋겠다. (문화일보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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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5-19 17: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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