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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관 목가구공방 대표목수)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비례’라는 용어가 주는 감정은 경외에 가깝다. 

특히 나처럼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는 방식을 택한 제작자에게 비례는 거의 유일한 구원에 가깝다.


목수로서 나의 눈이, 그리고 손이 무뎌졌다고 느낄 때마다 만드는 가구가 있다. 서안(書案)이다. 서안은 선비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던 낮은 책상을 말한다. 내가 만드는 서안은 대강 길이 98㎝, 너비 38㎝, 높이 32㎝ 정도이다. 

상판 하나, 상판을 지지하는 측판 두 개, 양쪽 측판을 이어주는 하부의 가로판 하나. 이렇게 단 네 개의 판재로만 이루어져 있다. 어떠한 장식이나 기교도 없다. 나무의 색과 결이 주는 장식성, 집중과 숙련의 기술적 완성도, 그리고 비례만으로 아름다움을 구현해야 한다.

내게 목공을 배우는 이들이 처음 만드는 가구도 이 서안이다. 그리고 10개월의 과정 마지막에 다시 서안을 만든다. 입학 작품으로 만든 서안과 졸업 작품으로 만든 서안의 차이가 교육기간 동안 수강생이 쌓은 성취를 가늠하게 해주며, 선생으로서 나의 자격을 검증하는 척도가 된다.


그런데 이 서안을 만들며 수강생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비례다. 아름다운 비례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손의 능력’을 말하기 전에 비례를 보는 눈을 가지는 것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좋은 비례와 그렇지 않은 비례를 구분하는 첫 번째 단계부터 헤매기 일쑤다.

왜 비례가 어려울까? 나는 그 이유를 ‘관계성’에서 찾는다. 비례는 관계를 파악하고 조율하는 힘이다. 서안의 상판 가로 길이가 98㎝인 것은 높이가 32㎝이기 때문이다. 너비가 38㎝인 것은 가로가 98㎝이기 때문이다. 98㎝에 38㎝가 적당한 것은 사용하는 목재가 약 200도에서 탄화시킨 애쉬(Ash)이기 때문이다. 탄화된 애쉬의 짙은 밤갈색이 그 칫수를 적절하게 만든다. 


만약 메이플처럼 밝은 목재라면 너비를 42㎝ 정도로 늘려야 더 적절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목재의 결이 조밀하다면 같은 애쉬 탄화목이라도 너비를 1㎝ 정도 더 늘려야 한다. 만약 목재의 결이 넓은 무늬결이라면 너비를 최대 2㎝까지 줄여야 한다.

서안의 높이가 32㎝인 것은 신장이 172㎝에서 176㎝ 사이인 사람이 앉아서 노트북을 사용하기 편한 칫수이기 때문이다. 단, 맨바닥이 아니라 약 8㎝의 방석을 사용한다는 전제 조건이다. 물론 방석의 쿠션 정도에 따라 변수가 생기기는 하지만 대강 큰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칫수다. 만약 노트북이 아니라 원고지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용도라면 조정이 필요하다.

정리하면 이렇다. 서안 상판의 가로는 높이와 관계되며, 너비는 가로와 관계된다. 가로와 너비의 칫수는 목재의 무늬 그리고 색과 관계된다. 모든 요소가 독립적이 아니라 다른 요소와 관계된다. 때문에 도면상 칫수가 정해졌다 하더라도 목수는 목재를 선별하고 재단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칫수와 칫수, 칫수와 목재, 목재를 구성하는 물성의 관계를 파악하고 대응해야 한다.


판재 네 개에 불과한 서안을 아름다운 비례로 완성하는 것은 관계성을 이해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는 능력이 갖춰져야 비로소 가능하다. 극도로 단순한 구조이기에 속이거나 감출 방법은 없다.

서안을 만들어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일주일을 바라본다. 또 다른 작업대에서는 다음 가구를 만든다. 만드는 과정에서 수시로 기존에 만든 서안을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서안에 담긴 관계성이다. 내가 그 관계성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읽고 조절하고 구성해 냈는가를 바라본다.

한 수강생이 말했다. “(비례가) 다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유를 짐작한다. 그가 보는 것은 단지 외형으로 나타난 칫수의 파편들이다. 그 파편들을 넘어 관계를 읽지 못하면 아름다운 비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업대 위에 올려진 한 점의 서안이 내게 말해준다.

‘비례’는 ‘관계’다. (국민일보 202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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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4 11: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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