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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몰락으로 겨우 선정에의 의지를 펴보고자 했던 명종이 나이 서른네 살,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앞서 명종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순회세자(順懷世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 없이 열세 살의 나이로 죽었다. 1563년(명종 18)의 일이다. 더군다나 명종은 왕위 계승자를 정해 놓지도 않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으로불러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아보려고 한다.”며 익선관을 이들에게 차례로 써보라고 했다. 

 

하성군(河城君, 후에 선조)은 나이가 제일 어렸는데도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이것이 어찌 보통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명종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마음속으로 왕위를 전해 줄 뜻을 정했다. 세자라는 정식 명칭이 붙여지지 않았을 뿐, 명종은 하성군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하성군을 자주 불러 학문을 시험해 보기도 하고, 별도로 한윤명과 정지연 같은 선생을 선택해서 가르치게 하기도 했다. 선조는 글 읽는 것이 매우 정밀해서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많이 질문했다. 심지어는 선생들조차도 대답을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1567년(명종 22) 6월 28일, 전부터 자주 앓던 명종이 이날 새벽 갑자기 위독해졌다. 이준경과 심통원(沈通源) 등이 승지, 사관과 함께 침전에 들어가 보니 명종은 이미 의식을 잃고 신음할 뿐이었다. 이준경 등이 엎드려 울면서 후사의 결정을 재촉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명종은 겨우 한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준경은 임금의 뜻이 내전에 물으라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이 일을 중전에게 여쭈었다. 이때 중전이 병풍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을축년(명종 20)에 위독하실 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으로 정하시었소. 

- 《연려실기술》 권12, <선조 조 고사본말>, 선조입승대통

  

명종은 그 이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에 이준경이 바로 주서 황대수(黃大受)를 불러서 발 앞에 나아가 대통 계승의 전문을 쓰게 했다. 황대수는 ‘셋째 아들 하성군에게 전한다’라고 하는 글자 중 셋째 아들의 ‘삼(三)’ 자를 ‘삼(參)’ 자로 썼다. 삼(三) 자를 굳이 삼(參) 자로 대체해서 쓴 것은 협잡을 막기 위해서였다. 덕흥군에게는 아들이 세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삼(參) 자로 쓰지 않아도 그것을 변조하기는 어려웠겠지만, 만일의 경우 아들이 다섯이었다면 몇 획을 그음으로써 삼(三)이 오(五)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중국에서는 협잡으로 왕이 바뀐 일이 있었다. 청나라 강희제가 죽었을 때의 일이다. 강희제에게는 원래 아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제14왕 윤진(允)의 재덕이 가장 출중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희제는 ‘제14왕 윤진에게 전한다(傳十四王允)’는 유언을 남겼는데 유언의 글자가 비슷한 점을 악용해 누군가가 변조를 했다. 즉 열 십(十) 자에다가 한 획을 더 그어서 어조사 우(于) 자를 만들고 윤진(允)이라는 진() 자를 보일 시(示) 변에 곧을 정(貞) 자로 고쳐 다른 글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언은 ‘傳于四王允禎’이 되어 제4왕 윤정에게 전하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해서 추대된 황제가 옹정제다. 

 

원래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의 자격 요건에 장자 상속의 원칙은 조선 시대 이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과 같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원칙대로 시행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 시대 500여 년간 추대된 왕은 모두 27명이었다. 이들 중에서 왕의 적장자, 적장손이었거나 혹은 이들이 없었을 때에 서장자(庶長子)로서 정통성에 아무런 문제 없이 정상적으로 세자나 세손에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했던 사람은 겨우 10명에 불과했다(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정조, 순조, 헌종, 순종). 나머지 17명의 왕은 세자의 책봉 과정이나 왕위 계승에 있어서 원칙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정종-태종, 인종-명종, 경종-영조와 같이 형제 계승의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예종, 성종, 효종 등 왕의 적장자나 적장손을 제치고 차자로서 계승한 경우도 있다. 또 반정이나 찬탈과 같이 물리적인 실력 행사에 의해 즉위한 세조, 중종, 인조와 같은 경우, 왕자가 아닌 먼 왕족으로서 대통을 이은 선조, 철종, 고종과 같은 경우, 광해군과 경종처럼 서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경우, 그리고 세자가 교체되어 들어온 정종과 세종의 경우가 있었다.

 

왕위 계승에는 능력이나 도덕성 역시 중요한 계승 조건이었다. 즉 세자가 영 미덥지 못하면 그다음 아들에게 대통(大統)이 옮겨 갔다. 그도 미덥지 못하다 싶으면 형제 중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자에게 대통을 계승하게 했다. 또 세자가 즉위 전에 죽은 경우에는 여러 아들 중에서 택정했다. 따라서 왕에게 아들이 없을 때는 세자의 선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왕이 유언으로 추대한 인물이나 왕이 죽은 뒤에 후대 왕을 추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계에서 택정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조선 왕조에서 왕의 적자, 적손이 아닌 사람으로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선조였다. 그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로서 명종이 서거한 후 대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열여섯 살에 왕위에 오른 하성군 균(鈞), 즉 14대 선조의 처음 이름은 균(鈞)이었으나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의 이름이 부()였기 때문에 항렬자를 따라 연()이라고 고쳤다. 선조는 왕실의 방계로서 대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그에 따라 1569년(선조 2) 11월 선조의 생부인 덕흥군은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대원군이란 왕이 후사 없이 죽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경우 새로운 왕의 아버지를 호칭하는 직함이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대원군이라 불린 사람은 선조 아버지인 덕흥대원군과 인조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元宗), 철종 아버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고종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등 모두 네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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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09 21: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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