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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임금 영조는 서원 170곳 훼철을 강행 했을까? - 서양과 중·일이 변화 추동할 때 … 조선에선 “절대 바뀌지 말자”는 ‘성리학’에 몰두
  • 기사등록 2024-04-22 09:08:02
  • 기사수정 2024-04-22 09: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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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서원운동’은 오히려 조선정치가 퇴행하고, 과학이 사라진 나라로 전락하는 등 내내 부담이 되었다. 그 서원의 효시는 조선 중종 38년(1543년),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백운동서원’이다. 서원의 운영 방식과 규모는 주자(1130-1200)가 세운 백록동(白鹿洞)을 모방했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안향 영정. 서원의 효시는 조선 중종 38년(1543년),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백운동서원’이다

그 후 7년이 지난 1550년 주세봉의 뒤를 이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퇴계 이황의 건의에 따라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전답까지 하사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세워진다. 사액(賜額)은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리는 행위다. 따라서 사액서원 소수서원은 국가가 공인한 서원인 것이다. 


퇴계 이황이 임금에게 건의해 세워진 ‘소수서원’. 임금 선조의 친필 현판과 전답까지 하사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세워진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양성이라는 순기능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 기대는 혼란한 조선 중후기를 겪으며 사라져갔고 우후죽순처럼 서원이 설립되어 특권화 같은 퇴행을 초래한다. 서원은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고, 면세-면역의 특전과 혈연-지연관계, 학벌-사제-당파라는 파당과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다. 이 과정에서 조정에 재정적 부담을 초래하였고, 백성을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는 등 폐단이 심각해진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학문을 신장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서원에서 학문을 신장하기는커녕 되레 학문의 폐쇄성을 조장한다. 공자와 맹자 등을 중시하는 오직 성리학으로 빠져든 것이다. 서원에서 노자와 장자 등을 하찮은 학문으로 취급하고, 당시 중국에서 풍류를 이뤘던 양명학의 길을 막아선 것도 서원이었다. 이로부터 조선에서 과학은 퇴보하고 기술이 사라지고 만다. 도공이나 종이 만드는 기술 등이 현격히 떨어진다. 조선이 건국하고 나서 50년 만에 세계적인 과학 선진국으로 이끌었던 조선이 과학을 망각한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조선의 성리학’이었던 학문체계가 ‘성리학의 조선’으로 바뀐다. 주자를 통해서 학문을 이해하는 경직된 수준으로 빠져든 것도 이쯤부터였다. 퇴계 이황과 퇴계 제자들, 그리고 그들이 조장해놨던 서원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조선에서의 서원 설립은 1543년 주세봉이 시작했으나 서원이 대대적인 붐을 일으킨 것은 퇴계에 의해서 였다. 퇴계는 1550년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임금에게 건의해 사액서원을 만들었고, 이후 대대적인 서원 붐을 만든다.

조선에서 서원의 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초기 명종 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개 소에 이르렀다.

 

조선 조정에서는 내내 서원은 부담이 됐다. 서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는 잇따랐다. 그 중심에는 호남 선비와 서인-소론계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이를 마땅히 제지할 길이 없었다. ‘선비들의 공부하는 곳’이라 해 폐단이 심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서원 폐단을 비난”하는 것을 두고 “선(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몰아붙였고, 관노비를 투속(投屬)시키고 기선군(騎船軍)을 분급(分給)하기까지 하며 둔전(屯田)과 속공전(贖公田)을 끊어 주는 비리가 이어졌다. 

 

심지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라는 엄중한 시기에도 서원만은 건드릴 수 없는 곳이었다. 군량미가 부족해도 서원에 비축해 둔 곡식을 가져다 쓸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1593년 8월 3일에 비변사가 “외구(外寇)를 막은 뒤에야 선비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그 본말을 결단코 전도하여 시행해서는 안 된다”라고 따져 물었다. 비변사는 “각 고을에 이미 향교가 있고 선현(先賢)의 서원에도 사액한 곳이 있으니 역시 공부할 수 있다. 서원에 있는 곡물 등을 거두어 군량에 충당하게 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도 퇴계와 그 제자들이 주도한 소위 힘 있거나 권세 있는 서원의 곡물은 건드릴 수 없었다. 

 

임금 선조는 1595년 7월 1일에 서원의 파당으로 인한 폐단이 심하다며 혁파를 선언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원이 없는 고을이 없고, 제사를 받는 자도 하찮은 사람이 많다”며 “유생인명이 역(役)을 도피하는 소굴이 되고, 글 읽는 미풍이 아예 사라졌다”고 한탄해 했다.

 

1634년 10월 16일 인조 때 최명길이 “근래 서원의 폐단이 엄청난다.”라고 고하자. 임금이 “서원의 폐단이 이러하기 때문에 사액(賜額)을 청하는 경우가 있어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1644년 8월 4일에는 나주출신인 경상 감사 임담(1596-1652)이 서원의 폐단을 주장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서원이 세워질 때 열 군데에 불과했으나 해마다 불어나 고을마다 즐비하게 되었다. 그 폐단이 널리 퍼지고 논의가 공정하지 못한 데까지 이르렀다. 다투어 향사하고, 사사로이 명예를 세우고 배척과 훼방하기도 한다. 사당(私黨)으로 전락했다. 조정이나 관리들은 막지 못해 습속이 점점 투박해지니, 한심스럽다”고 말했다. 

 

1664년(현종5년) 3월 3일 사액서원을 청하는 요청에 첩설 금지나 무용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좌명이 “서원 사액을 겹으로 하사하지 않는 것은 폐단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자 임금이 “서원은 한 군데면 족하지 겹으로 설립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 서원을 많이 설립해야만 유풍(儒風)이 흥기하고 그렇지 않으면 유풍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선비들이 하늘같이 앙모하는 이로는 선성(先聖) 같은 이가 없으니, 향교에 모여 독서하는 것이 좋지 하필 서원에 들어가야만 그것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길이겠는가?”라고 말했다. 

 

1676년(숙종 2년) 10월 25일에 상주 유생 이재헌 등이 이언적, 이황, 유성룡, 정경세, 이준 등을 모시는 도남서원의 사액을 내려주기를 청하자 당시 판서(判書) 이지익(李之翼)이 “이들 각각 서원(書院)을 세웠고 모두 액호(額號)를 내려 주었다. 서원 첩설(書院疊設)의 막고 있으니, 액호를 겹쳐 내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막지 못하고 사액되고 만다. 

 서원의 문제를 제기했던 서포 김만중, 소설 <구운몽>의 저자이자 당시 대사성이었다.

숙종 7년 1681년 6월 2일에 소설 <구운몽>의 저자이자 당시 대사성이었던 김만중(1637-1692)이 “서원을 설치한 뜻이 아름답지 않은바 아니나, 그 수가 너무 많아서 한 고을에 7, 8군데에 이르고, 한 도에 80~90군데에 이른다. 서원의 성대함은 영남(嶺南)만 한 곳이 없는데, 널리 전토(田土)를 점유(占有)하고 한정(閑丁)을 많이 모아들였다. 권력(權力)은 매번 수신(守臣)보다 높은 데 있고, 많은 사람이 모여 놀면서 담소(談笑)하되, 서로 경박한 의논만 하고, 아랫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써 일삼으니,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함을 염려할 만하다”고 일갈하는 상소했다. 

 

숙종 21년 1695년 12월 13일 승지 윤덕준과 유상운이 서원 첩설의 폐단을 극언하기도 했다. 

 덕촌 양득중. 그는 영조 7년 1731년 10월 29일에 서원의 폐단을 임금 영조에게 직언했다. 이에 영조는 10년 뒤 서원 남설을 막는 제도적인 장치와 실행에 나섰다

영조 7년 1731년 10월 29일에 전 장령 양득중이 임금 영조에게 “서원이 많아지니 군액(軍額)이 감소되고, 향교(鄕校)가 폐지되니 사습(士習)이 타락한다.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학교의 행정(行政)을 수명(修明)하여 배양(培養)의 도리를 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주장해 서원의 폐해를 알렸다. 

 임금 영조는 임금에 오른 18년 째인 1741년, 덕촌 양득중의 요청을 받아들여 붕당의 근거가 되고 있던 서원·사우의 사적인 건립 등을 금지시켰고, 나아가 170여개의 서원과 사우의 훼철을 강행했다

이에 영조는 “그 말이 또한 질박(質樸)하다”고 수용하고, 10년 뒤인 1741년 붕당의 근거가 되고 있던 서원·사우(祠宇)의 사적인 건립 등을 금지시켰다. 또 이를 어긴 170여 개소의 서원·사우에 대한 훼철을 강행함으로써 서원 남설에 철퇴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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