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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 / 100년 전 무장 독립운동사 연구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 기사등록 2020-07-13 18:02:26
  • 기사수정 2020-07-15 17: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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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올해는 북간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해방 75주년이 되도록 이 장대한 승전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는 학술적 분석과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봉오동전투는 포수(捕手) 출신 홍범도 장군이 총을 잘 쏴서 일본군을 물리친 것이라는 정도가 그동안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독립운동사를 학문적으로 밝히고 구체화 해야 할 학계조차 몇몇 개인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책 발간으로 학술연구를 대체했다. 학계마저 이른바 '영웅사관을 고착화 하는데' 기여한 셈이다. 봉오동 전투는 100주년이 되도록 살피고 전승해야 할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그저 기적과 신화의 영역에 방치해 두고 말았다.


왜 봉오동에서 대규모 독립전쟁이 일어났는지, 그곳에서 우리 독립군들이 어떤 무장을 갖췄기에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는지, 무장 독립전쟁이 발발할 당시 북간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봉오동 주민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이처럼 봉오동전투에 관한 학술적 연구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이는 역사학계의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현장답사가 어렵고 사료 발굴이 힘든 분야라는 이유로 봉오동전투는 오랫동안 학계로부터 외면당해 왔다. 대한민국 군대의 빛나는 승전으로 기리고 있는 이 역사가 더 이상 신화의 울타리 안에 유폐(幽閉)돼서는 안 된다. 

 

그런 가운데 2016년 7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설립된 후 몇 차례의 학술세미나를 열면서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가 가능했던 역사적 진실에 구체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봉오동에 무장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정예 병사로 훈련시켜 봉오동⦁청신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 최운산 장군(1885~1945)이라는 사실, 그 독립군 통합 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이 최진동 장군이란 사실도 비로소 밝혀졌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의 헌신이야말로 봉오동전투 승리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이 늦게나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봉오동전투 승전일(1920.6.7) 한 달쯤 후인 지난  7월 9일 육군사관학교(육사) 충무관에서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기념관과 함께 100년 전 있었던 대한민국의 독립전쟁을 학술적인 토론의 장에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1920년 임시정부 설립과 함께 북간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쟁취한 독립군의 승전을 대한민국 군대의 승리로 인식한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1920년 독립전쟁 재조명을 주제로 육군사관학교 충무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과 이원우 화랑대연구소장,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전투의 핵심 주역인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이 참석했다.(사진=국방일보)


다섯 시간 동안 다섯 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의가 이어졌다. 먼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신주백 소장이 “1920년 독립전쟁 준비와 독립군의 전투”란 제목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무장 독립전쟁을 독려했던 상황과 당시 북간도 독립군의 전쟁 준비에 대해 이야기하며 봉오동전투가 대한민국의 독립전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근현대사기념관의 심철기 박사는 “1920년 독립전쟁 참여세력- ‘의원안’에 나타난 의병세력의 성격”에서 당시 의병 세력의 무장 독립전쟁 가담 가능성을 논하고, 당시 한인들의 움직임이나 조직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길 기대했다. 

 

 이상훈 육사 교수는 “「봉오동전투상보」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봉오동전투 후 일본군이 기록한 보고서 「봉오동전투상보」의 내용을 분석, 발표했다. 이 교수는 독립군과 일본군의 이동경로를 추적한 결과 일본 월강(越江)추격대의 이동양상은 패전의 과정이었고 전투상보가 '패전보고서'에 가깝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 교수는 당시 일본군이 그려놓은 전투지도와 현재의 구글지도를 화면으로 띄워 비교하면서 1920년 당시 봉오동 독립전쟁의 전투지역을 비교적 자세하게 추정, 설명했다. 봉오동전투의 현장이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봉오동 저수지가 아니라 10km가량 더 들어간 산 위였음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참석한 역사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위치를 드러낸 전투 현장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당시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리며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시나브로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되살린 횃불이 되었다. 


이어서 동북아역사재단의 신효승 박사가 “청산리 전역의 전개에 대한 군사적 재검토”란 제목으로 일본군의 움직임과  비교하면서 독립군의 전투력이 상당했음을 확인했다. 그의 발표 중 1920년 3월15일, 250명의 독립군이 신출귀몰한 전투력을 자랑한 미산전투가 구체적으로 재조명되어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지난해 일본군 「간도출병사」를 완역한 육군사관학교의 김연옥 교수는 “「간도출병사」를 통해 본 강안수비대의 실상”이란 제목으로 두만강변에 설치된 일본군 국경수비대의 시대별 변화와 움직임을 설명했다. ‘강안수비대’란 명칭으로 강 건너 중국으로 출동이 용이하도록 상주시킨 부대의 역할과 임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등 독립군의 전투력을 인정하고 대비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제하 억압받는 민족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방향키 역할을 했던 중요한 역사가 분단을 핑계 대는 후세대의 방치로 100년의 시간이 흐르며 신화화 되었던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역사도 그렇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래서 국민들의 역사의식과 역사연구는정 비례한다. 


100년이 지났지만 이제 시작하는 무장 독립운동 연구에 인재를 투입하는 일이 국가적 과제로 선정되어야 한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에 남아있는 독립운동 사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부터, 국사편찬위원회가 가진 사료를 번역하고 공유하는 일부터 시작되기를 바란다. 


후세대가 독립된 국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헌신했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후세대인 우리의 몫이다. 이제 세계 10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 대통령이 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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