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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5- "신뢰쌓기, 어렵지만 꼭 필요하다"
  • 기사등록 2020-07-03 16:50:42
  • 기사수정 2020-07-03 17: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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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18세기만 해도 스위스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젊은 남자들은 용병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에 군인으로 고용되어 목숨 값으로 돈을 받아 그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 살았다. 돈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경우도 흔했다.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혁명 당시에 프랑스 궁전을 지키는 용병으로 있었다. 그들은 1792년에 당시의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786명 전원이 전사했다. 다른 나라 용병들은 대부분 도망했는데, 이들만은 모두 장렬한 죽음을 택했다. 


그들인들 왜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는가. 만일 자신들이 살려고 도망해버린다면 그 이후부터는 아무도 스위스 사람들을 용병으로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후손들이 먹고 살 길을 막아버린 조상이 되기 때문에 비장하게 죽는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은 말 그대로 자기 후손들이 절대로 외국인에게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하려는 목숨을 건 결단이었던 것이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호반 도시 루체른에 가면 ‘빈사의 사자상’이 있다. 앞에서 말한 스위스 용병들 786명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1821년에 세웠다.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사자가 죽어가면서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를 앞발로 움켜 안으려는 모습이다(사진 참조).


▲스위스의 루체른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위키피디아> 사진). 


이 사자상은 요즘 외국 관광객이 흔히 찾는 명소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볼만한 것 하나를 더 본다는 느낌이 아니라 숙연한 마음과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도 이 기념비를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을 주는 바위”라고 말했다. 


▲전통 복장을 한, 바티칸시국의 교황 근위병 (<위키피디아> 사진).


바티칸시국에서는 근위병으로 스위스 사람을 쓰는 게 오늘날까지도 굳건한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바티칸 측으로서는 근위병으로 스위스 사람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빈사의 사자상’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누구나 바티칸의 이런 전통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목숨과 맞바꾸면서 확보한 신뢰야말로 정말 믿음직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진정성’ 논란이 많이 벌어진다. 여당과 야당의 설전에도 상대방의 태도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는 공방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심심찮다. 

높은 지위를 지닌 사람이나, 심지어 대통령이 어떤 언급을 해도 그 ‘진정성’을 못 믿겠다고 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주장을 강조할 때에는 ‘진정성’을 갖고 하는 얘기니까 귀담아 들어달라고 한다.


한국 사회가 이처럼 온통 ‘진정성’ 논란을 벌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불신이 팽배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 비판하거나 동의할지언정 ‘믿을 수 있다’거나 ‘못 믿겠다’고 말할 까닭이 애초에 없지 않는가.  


신뢰는 개인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국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요구되는 가치이다.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 소비자와 생산자, 여당과 야당, 정부와 국민, 국가와 국가 등등의 사이에서 신뢰는 공통적으로 요구된다―물론 각 신뢰의 성격이나 깊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리 이런 차이를 지적하더라도 어쨌든 신뢰성은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라는 점이다.


왜 신뢰의 문제를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가? 우선, 불신이 만연하면 한 개인이든 한 국가든 불필요한 대가(代價)를 막대하게 지불해야 한다. 믿지 못하니까 믿을 수 있게 하려는 일종의 신뢰(안전, 견제, 감시)장치를 마련하는 데 비용이 들고, 또 그 장치 역시 믿음직스럽지 못하니 그 장치에 대한 장치를 하는 데 비용이 들게 되고…, 이런 식으로 신뢰 확보 비용은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다.


불신 사회의 보다 큰 문제점은 그것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사회, 즉 서로 다른 입장이나 이해(利害), 관점, 가치관, 정치적 견해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늘 충돌이나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기본적인 상호 신뢰가 없을 때는 이런 차이와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해결하는 통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툭하면 한 사회가 온통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태에 휩싸인다. 결국 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행복지수가 현저히 낮아지고 만다.


공자(孔子)는 신뢰성이 없으면 아예 나라가 온전히 서지(立) 못한다고 갈파했다[『논어』 ‘안연편(顔淵篇)’]. 그는 한 나라가 제대로 존립하기 위해서는 식(食), 병(兵), 신(信)의 삼요소가 구비돼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국가 성립의 필수적 요소는 경제력, 국방력, 신뢰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셋 중에서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지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면 어느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공자는 서슴없이 ‘신(信)’[신뢰성]이라고 단언했다. 그것도 다음과 같은 살벌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고서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신뢰성은 이토록 중요하지만, 구축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한 개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과 비슷한, 좀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뢰성을 두텁게 쌓기는 상당히 어려운데, 무너뜨리기는 대단히 쉽다. 공들여 쌓아 놓은 게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돼 버릴 수 있는 게 신뢰성 쌓기다.


왜 오늘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소득이 있고 비슷한 문화생활을 누리는 다른 나라  국민만큼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지 못할까? 우리 사회 전체의 신뢰성 수준이 심각한 위험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신뢰의 구축이나 회복은 결코 쉽지 않다. 제발 믿어달라고 반복하여 호소한다고 해서 신뢰성이 싹트지는 않는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어쩌면 옛 스위스 용병같은 비장한 각오, 즉 신뢰는 마땅히 목숨까지 걸고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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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7-03 16: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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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1 개)
  • hububu2020-09-15 15:13:46

    신뢰로 인한 후손들의 보살핌이 바로 선순환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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