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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학과 교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에 관한 우리 지역 얘기를 끝으로 필자의 칼럼도 마치고자 한다. 1808년 프랑스 정치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로 해석된다. 로마 공화정이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2년)을 치르는 동안 최고위직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

1440년 헨리 6세에 의해 설립된 세계적 사학 명문 영국 '이튼 칼리지'(Eton College)가 있다. 교내 운동장 건물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전장에서 죽어간 1천900여 명에 달하는 이튼 칼리지 출신의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두고 있다. 미국도 1950년 한국전쟁에 142명의 장군 아들이 참전하여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은 어떤가? 물론 훌륭한 지도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논문 표절, 신분적 갑질, 탈세, 횡령, 성추행,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불법 증여, 이중 국적 등 종류도 많고 다양하여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쉽지 않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스럽다. 오히려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병들고 부패한 귀족이라는 의미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반대말이다. 그렇지만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미담(美談)이 들려온다. 오늘은 우리 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구읍지』와 『달성 서씨 학유공파보 권상(卷上)』의 기록 중,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종께서 구계(龜溪) 서침(徐沈) 선생이 살고 있는 달성의 지형이 말(斗)처럼 우묵하고 천혜의 환경을 갖춘 성(城)이므로 국가에 바치고 대신 남산 옛 역터에 더하여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또는 蓮信新池)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침 선생은 나라 땅이 모두 국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는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다른 청을 하라고 했다. 이때 서침 선생은 개인의 사사로운 보상보다는 대구 지역민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한다면서 대구 지역민들에게 상환곡 이자를 한 섬당 5되 감해주기를 청했다.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서침의 인간됨을 높이 사고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로부터 대구 지역민들은 상환곡 이자를 탕감받게 돼 그 보답으로 서침 선생의 공덕을 찬양하여 1665년(현종 6년),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連龜山·현 제일중학교 교정) 북편에 숭현사(崇賢祠)를 짓고, 1675년(숙종 1년) 서침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서침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구의 진산 연귀산에 있었던 숭현사는 1718년(숙종 44년) 중구 동산동 지금의 신명고등학교 옆으로 이건하여 '구암(龜巖)서원'이 된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세웠다. 1995년 지금의 자리인 북구 산격동 연암산 연암공원 내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지역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경주 최씨 가문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한 일, 1778년(정조 2년) 대구 판관 이서가 그의 사재(私財)와 지역민 후원으로 신천에 제방(상동교-수성교)을 쌓아 신천 범람으로부터 대구 사람들의 인명과 재산을 지켜준 일은 참으로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체를 통해 코로나19로 피폐해진 지역민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일신문 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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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6-26 18: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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