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경복궁 옆 고즈넉한 골목 안의 한 장소가 ‘인스타 성지’로 뜨고 있다. 편안하면서도 묵직하고 튀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건물의 지상층이 뻥 뚫려 있다.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면 식물도감을 펼친 듯 작지만 밀도 있는 숲이 등장한다. 우물처럼 깊은 원통형 숲 아트리움 위로 고개를 들면 초현실적인 하늘 풍경. 이방인의 입장과 시선을 환대하는 숲을 통과하면 서촌의 오랜 시간과 이야기를 담은 ‘통의동 백송터’가 나온다.

얼마 전 모습을 드러낸 건물 ‘브릭웰’(brickwell, 벽돌우물)의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요청한 건 딱 두가지였다고 한다. “재료는 벽돌, 인근 백송터 자취에 호응하는 이미지.” 건축가 강예린과 이치훈(SoA 소장)은 “외피 장식재로서 벽돌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실현해보고자” 했다. 자세히 보고 만져봐야 벽돌임을 알 수 있다. 벽돌 쌓을 때 흔히 쓰는 모르타르 대신 벽돌 구멍을 관통하는 강철관으로 벽돌을 이어 붙였고,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줄눈 대신 폴리염화비닐(PVC) 이격재를 목걸이 꿰듯 끼워 벽돌 간격에 변화를 줬다. 벽돌을 삼등분해서 두께는 훨씬 얇다. 공예에 가까운 건축.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착시가 역동한다. 벽돌 모듈을 조절해 만든 틈과 창으로 자연의 빛과 인왕산의 풍광이 달려든다.

브릭웰과 어깨를 맞댄 백송터에는 원래 높이 16m에 둘레가 5m 넘는 아름드리 백송이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중국에서 종자를 가져와 심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30년 전 태풍에 넘어져 밑동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지역 주민들은 그 주위에 어린 백송 여러그루를 심어 정성껏 가꾸고 있다. “옆에 백송 있잖아요? 백송이랑 싸우지 말고, 백송의 어린 친구가 되는 상상을 해요. 같이 조금씩 늙어가는….” 건축주의 강한 의지에 건축가는 넉넉한 면적의 공공 정원을 만들어 개방하는 디자인으로 화답했고, 건축주는 통 크게 받아들였다. 하늘로 열린 깊은 우물 같은 이 공간은 정원이기에 앞서 길이다. 골목과 백송터를 연결하는 공공의 통로.

누구나 들어가 산책하고 앉아 쉴 수 있는 이 정원은 도시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나무들로 빼곡하다. 정원에서 키가 제일 큰 야광나무의 자유분방한 수형이 건물의 절제된 미감을 깨뜨리며 어우러진다. 병아리꽃나무, 국수나무, 가막살나무, 해오라비난초…, 겹겹이 심긴 키 작은 식물들의 이름이 낯설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이 점령한 획일적인 도시 풍경에 대한 비평이다. 얕지만 넓은 연못은 하늘을 투영해 공간을 확장시킨다.

정원을 디자인한 조경가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은 “사유지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주와 입주자, 동네 사람, 우연한 골목길 탐험자가 이 장소를 함께 가꾸며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정원 만드는 동안 놀라운 변화 두가지가 일어났다고 한다. 자기 집 옆에서 벌어지는 건축 행위에 심한 반감을 드러내던 동네 사람들의 태도가 백송터로 연결되는 길이 모습을 드러내고 숲처럼 나무가 심기자 급변했다. 박카스를 사 들고 왔고 연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새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는 것. 정원의 작은 연못은 새들의 동네 목욕탕이 되었고 야광나무는 새들의 동네 맛집이 되었다.

“새에게 좋은 일을 하면 분명히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벌어질 것”(조경가 박승진)이다. “개인의 땅이지만 공공에 열린 장소”(건축가 강예린)인 브릭웰은 함께 지혜롭게 쓰는 도시의 우물이다. 장마가 시작됐다. 깊은 우물 밑 잔잔한 수면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보면 어떨까. 소란한 일상을 잠시 벗어나 다시 통의동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겨레신문 2020.06.26)

©신경섭

©신경섭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0-06-26 18:08:47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유니세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