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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4) 인간에게는 고집불통의 속성이 있다
  • 기사등록 2020-06-15 12:28:53
  • 기사수정 2020-06-16 16: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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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옛날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린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사는 노인이 있었다. 이웃사람이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 어른, 어르신네 울타리가 너무 허술해요. 계속 이렇게 두다가는 도둑맞기 십상입니다.” 노인은 이웃사람의 이 말을 흘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어린 아들이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 울타리가 너무 허술한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도둑맞을지도 모르잖아요.” 노인은 아들의 말 역시 별로 신경 쓰지 않고서 듣고 넘겼다. 


얼마 후 실제로 도둑이 엉성한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집안 살림을 몽땅 훔쳐갔다. 그러자 노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아들놈은 어려도 제법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단 말이야. 이렇게 도둑맞으리라고 미리 내다본 걸 보면 정말 대견스러워!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물건을 훔쳐간 범인은 이웃사람인 게 분명해. 울타리가 허술하고 어쩌고 한 건 나중에 도둑질할 심산으로 연막을 친 게 맞아!” 


아들이나 이웃사람이나 노인에게 한 말은 똑 같다. 울타리를 허술한 상태로 놔두면 도둑맞을 위험이 있으니 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주장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똑같은 말이지만 귀여운 내 아들이 하면 선견지명의 징표가 되고 내가 싫어하는 이웃사람이 하면 범행을 덮으려는 음흉한 수작으로 해석된다.


유흥가에는 제비족이 있단다. 돈 많고 시간 많은 마나님들을 유혹하여 교묘한 방식으로 바람나게 만들어 돈을 갈취하면서 살아가는 고약하고 사악한 놈들이다. 이들의 상투적 수법은 유한마담들로 하여금 자신들과 ‘순수한 사랑에 빠졌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우스운 점은 나중에 몸 망치고 돈 뺏기고 나서도 그런 마나님들은 자신에게 접근했던 제비족에게 속았음을 내심 인정하지 않으려한다는 사실이다. 그 제비족이 다른 여자들의 경우는 몰라도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애써 그렇게 믿으려고 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정보나 지식, 주장에 접하면 그 근거나 타당성을 따져보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한다고 여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사실과 들어맞거나 논리적으로 믿을 만하면 수용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용하지 않는 합리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자평한다.


▲이 그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주사위를 이렇게 쌓을 수는 없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점에서 ‘음모설’을 닮았다.


정말 그럴까? 위 이야기 속의 노인은 정말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사람이고 우리는 항상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까? 지능이 높고 학력도 높고 심지어 사회적 지위도 상당해서 충분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거라고 기대되는 사람이 비상식적인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본의 ‘옴 진리교’ 신자들 중에는 장래가 촉망되던 과학도도 있었음을 생각해 보자.


큰 사건이 터지면 온갖 음모설(陰謀說)과 유언비어가 나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 자체로서 앞뒤가 맞지 않거나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모설이나 유언비어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은 우리의 편향적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바를 보려고 하고 그렇게 자기의 희망적 관점을 투영한 바를 사실에 대한 인식이라고 고집스레 우기는 태도다. 위 이야기 속의 노인이나 유한마담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이와 비슷한 성향은 인간의 일반적 속성이다. 쓸데없는 고집의 바탕 위에 세워진 믿음이나 지식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우습다고 보기에는 슬프고, 슬프다고 보기에는 우스운 인간 심리의 한 단면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 심리의 이런 면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사실이라고 믿는 바에 맞장구 쳐 주는 지식이나 정보,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 내 기존의 믿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은 설령 강력한 설득력을 지녔더라도 일부러 무시하거나 외면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사실이어서 믿는 게 아니라, 도리어 사실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정말로 사실이라고 고집을 부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선 이런 확증편향이 인간 심리의 엄연한 사실로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내가 확신하는 지식이나 정보, 믿음이 과연 이성적이고 보편적 설득력을 지닌 기반에 놓여 있는 것인지 항상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단지 아집과 아전인수적(我田引水的) 성향에 의해 합리화되고 있음을 깨달으면 서둘러 팽개쳐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극심한 자괴감과 아픔을 맛볼지라도 이런 대가는 치를 가치가 있다. 인간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의 황당한 믿음이나 주장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큰 불행과 비극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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