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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IBM사장)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사대(事大)를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중대사를 중국 황제에게 묻고 지침을 받기 위해 사신을 정기적으로 중국에 파견했다. 새해 문안을 위한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 연말 동지사(冬至使) 등 삼절사 외에도 명칭도 다양한 사신단이 수시로 중국을 오갔다. 조선왕조 개창 직후인 15세기 초부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1905년까지 명·청 사신단 횟수는 무려 1678회에 달한다.


사신단은 삼정승 또는 정2품 판서 중 임명되던 정사(正使) 외에 부사(副使), 기록관인 서장관 등 관리만 40명에 군관, 역관, 하인까지 합치면 500여 명으로 구성됐고 대부분 육로로 800㎞를 걸어서 오가는 힘든 여정이었다. 사신의 기록을 남긴 연행록(燕行錄)만 600여 종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실학자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정조 시대 정승 채제공이 '원한을 삼키고 원통함을 참는다'는 뜻으로 이름 붙인 '함인록(含忍錄)'이다. 일국의 재상이 사행길에 얼마나 수모와 고초를 겪었으면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안쓰럽고 측은하다. 사신의 왕래가 무역의 통로이자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주장도 있지만 주권국가의 국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굴욕이었음에 틀림없다.

지난주 유명한 책의 저자인 미국 학자와 우리나라 정치인의 영상 대담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내용을 보면 딱히 유명 학자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예리한 분석이나 통찰력은 찾을 수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였다. 뻔한 말이라도 우리나라 학자가 아니라 외국 교수를 통해 들어야 정책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믿는 것인지 조선시대 사신의 모습이 겹쳐 답답할 뿐이다.

조선왕조 이래 우리의 정치이념과 학문, 세계를 보는 관점과 철학은 늘 남의 것을 빌려온 것이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도 헌법과 법률도 따지고 보면 서양과 일본의 체계를 답습한 것이다. 남의 것을 받아들이되 자주적으로 따져 보고 새로운 지적 호기심으로 개선해 수용하고, 정해진 틀에서 대답을 찾는 수준을 넘어 근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가진 국민을 선진국민이라고 한다.


그저 풍요롭고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나라가 선진국이다. "지식의 수입 단계를 넘어 지식의 생산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다름 아닌 우리나라의 대표적 철학자의 주장이 새삼 각별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매일경제신문 20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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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6-11 18: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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